고려 충신 정몽주, ‘동방사림(東方士林)의 조종’ 으로 칭송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고려 역사에는 특이하게 ‘원간섭기(元干涉期)’가 있다. 고려가 대몽항쟁 끝에 강화를 성립시킨 1259년부터 반원(反元)운동에 성공한 1356년까지 97년 동안을 그렇게 부른다.
이 시기 7명의 고려 왕들은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아야 했고, 왕자들은 볼모가 되어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 북경)에 잡혀 있어야 했다. 이른바 ‘원의 부마국’ 시기에 고려는 역사의 한 전환기를 맞게 된다. 고려 왕실은 무신정권에게 잃었던 힘을 회복했지만, 조신(朝臣)들의 힘은 미미해져 정치가 실종되고, 고려는 점차 자생력을 잃어갔다.

역동 우탁(禹倬, 1262~1342) 선생은 ‘원간섭기’의 거의 전 시기를 살다간 시대의 증인이다. 그는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도 경서와 사기를 통달하고, 역학에도 정통하여 점괘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뛰어난 역학자였다.

부왕인 충렬왕의 후궁을 범했던 제 26대 충선왕의 패륜행위를 중지시키기 위한 우탁의 ‘지부상소(持斧上疏)’는 우리 역사상 목숨을 걸고 직간(直諫)한 최초의 사례로, 우리나라 선비의 대쪽 같은 지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소문이다.

700년 전, 1308년 아버지 충렬왕이 죽자 다시 복위한 충선왕은 선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 김씨를 취했다. 충선왕은 그녀를 숙비(淑妃)로 봉하여 패륜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마침내 감찰규정 우탁은 홀로 죽음을 각오하고 상복을 입고 부월(斧鉞,도끼)을 들고 짚방석을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충선왕의 곁에 있던 신하는 임금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상소문을 펴고도 감히 읽지를 못했다.

그러자 우탁은 호통을 치며 “경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로서 임금의 패륜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니, 경은 그 죄를 아느냐”고 통렬하게 꾸짖었다. 우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목숨을 걸고 충선왕의 잘못을 극간(極諫, 끝까지 간함)했다.

“군왕은 날마다 신하들과 더불어 정사를 토론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 잡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만고에 걸쳐 변할 수 없는 윤상(倫常)을 무너뜨림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사옵니까? 전하께서는 부왕이 총애하는 후궁을 숙비에 봉했는데, 이는 삼강오륜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종사에 전례가 없는 폐륜이옵니다. (중략) 군왕이 나라의 흥망을 가늠하는 것은 오직 인(仁)과 불인(不仁)에 달려 있사옵니다. ‘신하는 간언을 할 때 목숨을 건다’고 했는데, 오늘 소신에게 터럭만큼의 잘못이 있다면 신의 목을 치시옵소서.”
충선왕은 개혁군주였고 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상을 무너뜨린 자신의 패덕(悖德)한 행위를 극간한 우탁을 징치(懲治)하지는 않았다. 벼슬을 버리고 예안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마하던 우탁은 <탄로가(嘆老歌)>를 지어 어느덧 백발이 되어버린 자신의 늙어 감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한 손에 막대 들고, 또 한 손에 가시를 쥐고
늙은 것은 가시로 막고, 백발은 막대로 치려했더니
백발이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목숨을 걸고 자신의 옳음에 도전했던 기개 높은 우탁은 세월의 덧없음을 애절하게 슬퍼하지 않았다. 가시로 막고 막대기로 공격해도 지름길로 찾아오는 백발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이 시조에서 자연의 섭리는 거역할 수 없기 때문에 순응해야 한다는 달관적인 마음을 담고 있다.

정몽주는 우탁을 ‘동방사림(東方士林)의 조종’으로 받들었으며, 이황은 우탁을 흠모하여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하였다. 단양팔경 중 하나인 사인암(舍人巖)은 우탁이 사인 벼슬로 있을 때 자주 찾았던 곳이다. 사인암 주변의 바위에는 우탁이 두었다는 바둑판과 장기판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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