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전승리 이끈 쇠사슬전술, 고대중국역사 등장
- 역사를 거울삼는 자세… 혁신의 대표적인 태도


<여수돌산도 일대, 한국지명유래집, 네이버>
이순신의 해양방어 시설인 쇠사슬은 지난 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가장 상세한 사례는 중종 때인 도원수 유순정이 삼포왜란 이후 왜구를 막기 위해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실제 설치 사례는 현재까지 이순신의 일기밖에 없다.

유순정의 기록도 이순신과는 80여 년의 차이가 난다. 유순정의 제안에 따라 실제로 설치되어 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다른 기록들이 없는 것을 보면 그 후 쇠사슬이 계속 설치되었는지 확실치 않다. 유순정이 제안한 이 쇠사슬을 설치 전술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유순정의 창안일까? 아니면 다른 연원이 있는 것일까? 유순정 이후 80여 년이 지난 뒤에 이순신도 설치한 것을 보면, 어떤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수전(水戰)에서 쇠사슬이 설치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고대 중국역사다. 이순신도 탐독했을 역사책인 송나라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과 조선의 세종이 명해 편찬한 《역대병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에 나온다.

이순신이 탐독했을 것이라고 한 것은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최초의 전기인 조카 이분이 지은 《이충무공행록》의 기록을 보면 《자치통감》과 관련된 기록, 《삼국지》를 인용한 메모, 《역대병요》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도 추정되는 메모가 나오기 때문이다.

《자치통감》에는 나오는 쇠사슬 전술은 고대 중국의 진(晉)나라 명장 <왕준(王濬)>의 이야기에 나온다. 왕준의 이야기는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무려 1300년 전에 일어난 것이다. 왕준과 쇠사슬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서기 272년(임진년), 진(晉) 무제(武帝) 사마염은 명장 양호를 시켜 오(吳)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양호는 부하 장수인 왕준으로 하여금 수군을 육성케 하고, 배를 건조하게 했다. 왕준은 무려 7년 동안 전쟁 준비를 했다. 배는 길이가 120보로 갑판에서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을 정도였으며, 2천여 명을 태울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대형 전선으로 건조했다. 또한 그 배엔 나무를 쌓아 성(城)처럼 만들었고, 뱃머리에서는 익조 모양의 괴수를 그려 넣기도 했다. 왕준이 만든 배는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조선의 판옥선이 연상되는 모습이다.

오나라에서도 진나라의 침략 준비 상황을 알고 있었다. 오나라 장수 오언은 오왕 손호에게 대책을 세우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손호가 건의를 무시하자, 오언은 자발적으로 방어책을 세웠다. 오언이 제시했던 방어책의 하나가 바로 양자강을 가로질러 쇠사슬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 강 가운데는 철추(鐵錐, 쇠말뚝 혹은 쇠못)를 박았다. 쇠사슬은 적선이 넘어오지 못하게 할 목적이었고, 철추는 적선이 걸려 부서지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순신이 쇠사슬을 설치한 것도 바로 오언과 같은 목적이다.

오언이 설치한 쇠사슬과 철추 때문에 진나라의 왕준 군대는 양자강을 통해 오나라를 공격하기가 어려웠다. 왕준은 수중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고심했고, 지혜를 짜냈다. 그는 먼저 철추를 파괴하기 위한 뗏목을 제작해 뗏목을 띄워 보내 철추와 부딪치게 해 철추를 쓰러뜨렸다. 그 다음 그는 자신의 거대한 전선 앞에 둘레가 수십 아름드리나 되는 엄청난 크기의 횃불을 설치해놓고, 쇠사슬에 다가가 녹여 끊었다.

오언의 기발한 방어전략은 왕준의 지혜로 결국 무너졌고, 그렇게 강을 통과한 진나라 군대는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오나라와 진나라의 전투에 대해서는 선조를 비롯한 당시의 조선 관료들들도 아주 잘 아는 내용이었다. 1597년 7월 원균이 패전한 직후 선조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그 때 선조가 이순신에게 보낸 임명장인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에는 오나라의 명장 육항이 언급되어 있다. 임금이었던 선조도 수전(水戰) 전술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통신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전쟁 초기에 경상도 초유사로 활약했던 김성일도 오나라의 쇠사슬을 부순 왕준을 칭송했다.

왕준을 언급한 다른 사례도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류성룡의 수제자였던 정경세가 1597년에 지은 <수군(水軍)들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제사하는 제문>에서도 왕준이 언급된다. 그 이후인 19세기 중엽에 저술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왕준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로 보면, 이순신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강에서 적군을 막기 위한 전술의 하나로 쇠사슬 설치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이 읽고 공부했을 또 다른 전쟁사 책인 《역대병요》에도 쇠사슬을 활용한 전투 기록이 나온다. 원나라가 남송을 침략했던 13세기 때의 일이다. 원나라 세조는 1271년 남송을 침략했다. 그런데 이 때의 쇠사슬 전술은 공격하는 원나라, 방어하는 남송 모두가 활용했다. 공격용과 방어용이 함께 사용되었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일까?

침략자인 원나라는 남송의 양양성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시킬 목적으로 강에 쇠사슬을 설치해 강을 타고 올 수 있는 남송 지원군의 접근을 막았다. 반면 남송은 거꾸로 강을 타고 접근할 원나라 군대를 막기 위해 쇠사슬을 설치했다. 양양성의 남송 군대는 강에 나무말뚝을 꽂고 쇠사슬을 연결했다. 원나라 군대는 남송이 설치한 쇠사슬을 없애기 위해 톱으로 나무 말뚝을 자르고, 쇠사슬을 끊고 공격해야 했다. 《역대병요》에 언급된 남송의 쇠사슬 설치 모습은 《난중일기》에 나오는 나무말뚝을 세우고 쇠사슬을 설치하는 장면과 똑 같다.

▲ 1592년 3월 27일. 배를 타고 소포에 도착했다. 쇠사슬을 가로로 설치하는 것을 감독했다. 내내 나무 기둥을 세우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순신의 쇠사슬 전술은 80년 전의 유순정의 사례도 있었지만, 이순신이 그 사실을 몰랐다면, 아마도 이순신이 역사책들을 읽으면서 스스로 새로이 창안한 전술로도 추정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중국 전쟁사 속의 쇠사슬 전술은 모두 이순신과 달리 강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쇠사슬을 설치하는 모습은 결국 이순신이 역사를 거울 삼는 자세, 자신의 현실에서 새로이 혁신하려는 태도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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