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량해전 있었던 1597년 두개의 일기
- 쇠사슬 전략 이중환의 ‘택리지’가 뿌리

<호남절의록중 김억추 명량철쇄관련기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이미 세 번에 걸쳐 이순신의 철쇄(쇠사슬) 전술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그 모두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쇠사슬을 사용했는지 여부를 알기 위한 전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가끔은 일기를 쓰지 않았다. 1597년 9월 16일은 어땠을까? 그날 명량해전 낮의 그 엄청난 전투에도 불구하고, 깃털 하나 들 수 없었을  손으로 일기를 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명량해전 당시의 일기를 포함해 1597년의 일기 일부는 두 개가 존재한다. 명량해전 당시의 일기도 두 개가 있다. 아마도 후에 여유가 생겼을 때 그 시기의 일기들을 다시 정리하면서 기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명량 쇠사슬 전술은 구전설화?

두 개가 존재하는 명량해전 당시의 일기, 그리고 그 전후의 일기를 읽어보면 크고 작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두 일기 어디에서 명량해전 당일이나, 그 전후에 쇠사슬을 언급한 내용은 없다. 이는 이순신의 보고서가 인용된  《선조실록》이나 비슷한 시기의 다른 사람들의 기록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유로 명량해전과 쇠사슬 전술이 연결되었을까? 사료들을 비교해 보면, 명량해전이 누구도 믿기 어려운 승리, 기적 같은 승리였기에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전설화로 추정된다. 즉 《난중일기》에 기록된 이순신의 전쟁 대비 방책의 하나였던 쇠사슬 설치는 그 설화가 생길 수 있었던 근본 원인으로 보인다. 특히 이순신이 전사한 이후 기록된 조카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이 큰 역할을 했던 듯하다.

《이충무공행록》이 쓰인 이후 거의 모든 이순신의 전기는 《이충무공행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충무공행록》만이 《난중일기》 혹은 류성룡의 《징비록》, 혹은 다른 기록에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 이순신의 출생부터 전쟁이 일어나기 전년도인 1591년까지의 이순신의 삶이 상세히 나온다. 게다가 거북선을 만들고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 또 전쟁 중의 중요한 활약상도 가장 잘 정리되어 있다.

▲ 공(이순신)이 좌수영에 있을 때, 왜적이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예측하고는 본영과 소속 포에 있는 전쟁도구를 전부 보수하고, 또 쇠사슬을 만들어 앞바다를 가로지르게 했다.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된 이순신의 전쟁 준비 모습이며, 쇠사슬이 언급된 내용이다. 바로 이 기록이 필사 혹은 인쇄되어 퍼져나가면서, 또 입으로 입으로 전해지면서 명량해전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 자연스럽게 명량 쇠사슬 전술이 만들어진 듯하다.

그러나 명량해전에서 쇠사슬 전술은 이순신 자신의 기록이나 《선조실록》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임진왜란을 상세히 기록했고, 특히 이순신의 활동에 주목했던 류성룡의 《징비록》에도 나온지 않는다. 또 다른 전쟁기록물인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도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이를 보면, 명량 쇠사슬 전술은 이순신 시대 혹은 그 직후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명량해전 쇠사슬 전설의 시작 : 《택리지》

현재까지 확인된 명량 쇠사슬 전술의 가장 오래된 문헌은 1751년에 저술된 이중환의 《택리지》이다. 명량해전 이후 약 150년이 넘은 시점이다.

▲ 수군 대장 이순신이 바다에 머물며 쇠사슬을 만들어 바닷속 돌맥이 다리(石梁) 위에 가로로 걸쳐놓고 (일본군 전선을) 기다렸다. 일본군의 전선이 다리 위에 이르렀을 때, 쇠사슬에 걸려 곧바로 엎어졌다. …  (일본군 전선) 5~6백여 척이 한꺼번에 모두 침몰했다.

이중환의 《택리지》 이후, 쇠사슬 기록은 1799년 고정헌이 저술·간행한 《호남절의록》속에 기록된 김억추 부분에 나온다. 김억추는 명량해전 때 전라 우수사로 참전했다. 《호남절의록》에서는 명량해전에서의 김억추의 활약의 하나로, 쇠사슬을 언급했다. 즉 명량 해전 직전 이순신과 김억추는 명량해협에 쇠사슬을 설치할 전술을 세웠고, 김억추가 무거운 쇠사슬을 설치할 때 큰 힘을 썼으며, 결정적으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일본군의 배를 쇠사슬을 걸어 길을 막았다는 것이다.

《호남절의록》의 속의 김억추 활약 내용은 그 이후 1907년에 간행된 송병선의 문집 속에 들어 있는 <김억추 묘갈명>에도 언급된다. 이는 또한 1914년 간행된  《현무공실기》에도 나온다.  그런데  《호남절의록》이 간행되기 15년 전인 1784년에 위백규가 쓴 <김억추 묘갈명>에는 쇠사슬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묘갈명은 어떤 인물의 주요활동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볼 때, 김억추의 쇠사슬 관련 이야기는 《호남절의록》이 그 시작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침략자였던 일본의 기록 중에서 필자가 확인할 수 있었던 명량 쇠사슬 전술의 최초 기록은 1888년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펴낸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이 처음이다. “<읍지(邑誌)>에 따르면 이순신이 쇠사슬을 돌맥이 다리(石梁)에 설치했고 쇠사슬을 당겨 일본 수군 5백여 척이 전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오시무 카오루세이가 저술하고, 시바야마 나오노리가 1892년에 간행한 일본 최초의 이순신 전기라고 할 수 있는 《문록 정한 수사 시말 조선 이순신전(文祿征韓水師始末 朝鮮李舜臣傳)》에서도 거의 동일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 두 일본 저술 속의 명량해전 쇠사슬 기록을 살펴보면, 그 출처가 임진왜란 기간 동안 혹은 그 이후의 일본 측 기록이 아니다. 이중환의 《택리지》가 그 뿌리다. 《조선지지략》을 저술할 때 활용한 책이 《택리지》였고,  《문록 정한 수사 시말 조선 이순신전》은  《조선지지략》을 활용했다. 일본의 쇠사슬 기록은 일본 자체 기록이 아니라, 우리의 《택리지》가 그 시작이다. 이와 같은 여러 기록이 결국 명량해전 쇠사슬 구전의 진실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 기준으로 말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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