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은 25세 때 조선 마지막 과거(1894년)에 급제, 27살에 성균관 교수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근대교육, 특히 ‘한국 근대수학의 아버지’였다.

1904년 일제는 조선 정부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였는데, 이상설은 박승봉과 연명으로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반대하는 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를 철회시켰다. 상소의 요지는 “일본의 요구를 물리치지 않으면 국권을 지킬 수 없으며, 황무지의 개척을 자국민이 하지 않으면 국가재정이 파탄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일본의 요구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상황에서 이상설은 1905년 11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다. 1905년 11월 17일(고종 42), 일본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는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을사오적(乙巳五賊)과 ‘한국이 부강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이상설은 11월 22일 고종 황제가 사직(社稷)을 위해 몸을 바칠 각오로 조약에 반대할 것을 촉구하는 강한 상소를 올렸다.

“대저 그 약관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 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순사(殉社)의 뜻을 결정하여 단연코 거부하여 열조열종(列祖列宗)의 폐하께 부비(付卑)하신 중임(重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중략) 이번에 체결된 조약은 강요로 맺어진 것이니 마땅히 무효입니다. (중략) 폐하(고종)께서 힘껏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준엄하게 물리쳐야 하는데, 천주(天誅, 역적들을 죽임)를 단행해 빨리 여정(輿情, 여론)을 위로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도리어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 수괴를 의정대신 대리로 임명해 신에게 그 아래 반열에 나가게 하시니 신은 분노가 가득 차고 피가 텅 비며 뜨거운 눈물이 강처럼 흘러, 정말 갑자기 죽어서 모든 것을 잊고 싶습니다.”(<고종실록> 42년(1905년) 11월24일)

이상설은 이 상소에서 “아! 장차 황실이 쇠해지고 종묘가 무너질 것이며, 조종이 남겨준 유민들은 남의 신하와 종이 될 것입니다”라고 제국의 운명을 정확히 예견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당시 이상설 자결 미수 사건 목격담을 싣기도 했다.

이후 이상설은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 3월경 중국 용정의 서전서숙을 떠나 고종황제의 특사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 특사의 정사(正使)로 파견되어 한국 독립을 호소하였다.

 

특사 임무를 수행한 뒤 일제에 의해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진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해외에서 활동했다. 1910년 6월 러시아 연해주에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해 항일운동에 불을 지폈다. 도총재 유인석과 외교통신원 책임자 이상설은 고종에게 지원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13도 의군의 편성은 국권 회복 계획에서 나왔습니다. 군비가 부족하므로 내탕금(內帑金, 왕실의 금고)에서 군자금을 보내주십시오.”

이상설은 1914년엔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으며, 이듬해 상하이로 건너가서는 신한혁명당을 조직했다.

1910년 사형 집행을 앞둔 안중근 의사는 “선생은 법률과 산술에 정통하고, 영어·프랑스어·일어에 능통하다.

세계정세에 밝고 애국심이 강하며 교육으로 국가 백년대계를 세울 사람이다.” 라고 이상설을 평했다.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니, 내 몸과 유품을 모두 불태워 바다에 뿌리고 제사도 지내지 마라.” 이상설은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건강 악화로 1917년 3월 2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천추의 한을 남기고 48세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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