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취급 당한 필리핀 여성의 기막힌 사연
“살해 위협에 매일 밤 떨었다”

23살 연상 남편의 학대를 피하기 위해 남편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현금 등을 챙겨 집을 나간 필리핀 여성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서울동부지법 제11형사부(부장 설범식)는 남편 김모(46)씨에게 수면제를 탄 커피를 건넨 뒤 현금 20만 원을 훔쳐 달아나 강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A(23)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지난 22일 밝혔다.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 7명도 전원 만장일치로 무죄평결을 냈다. 달콤한 신혼생활을 꿈꿨지만 낯선 타국에서 가정 폭력에 떨어야했던 A씨의 사연 속으로 들어가 봤다.

지난해 5월 A씨는 필리핀에서 김씨를 만났다. 자신보다 20살 넘게 나이가 많은데다, 김씨와 결혼하면 필리핀을 떠나 타국인 ‘한국’에서 살아야했지만 A씨는 상냥한 김씨에게 호감을 느끼게 됐다. A씨는 “나와 결혼하면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김씨의 호언장담에 결혼을 결심했다.


입국 후 본색 드러내

이후 혼인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김씨가 이혼 경력이 있으며, 전처와의 사이에 A씨 또래의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김씨를 믿었던 A씨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비자 문제로 5개월 후 한국에 입국한 A씨는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A씨가 한국에 입국하기 전 5개월 내내 꿈꿨던 ‘행복한 결혼생활’은 ‘끔찍한 결혼생활’로 탈바꿈해 찾아왔다. 입국 당일부터 김씨의 태도가 돌변했던 것이다. 자신을 거칠게 대하는 김씨의 모습에 A씨는 적잖게 당황했다.

김씨는 짐을 풀기도 전에 “오피스텔부터 청소해라”며 드라이버로 위협을 가했다. 공포에 질린 A씨는 오피스텔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비행기를 타고 수천Km를 날아오며 쌓인 여독을 풀지도 못한 채였다.

본색을 드러낸 김씨의 학대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김씨는 대부분의 끼니를 라면과 초콜릿으로 때우게 하고 A씨가 불만을 말하기라도 하면 욕설을 퍼붓고 화를 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학대에 A씨는 전전긍긍했다. 남편 눈에 거슬리지 않으려 안절부절 못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고 혼자서 외출하거나 물건을 구입한 적도 없었던 A씨는 주변에 하소연 할 곳도 없었다. A씨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남편이 가해자로 돌변하자 속이 타들어갔다.


학대 견디다 못해 가출 결심

불행한 결혼생활이 이어지던 중, 지난해 10월 A씨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나이트클럽에서 김씨의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씨가 “탁자 위에서 춤을 춰라”고 강요한 것이다. A씨는 수치감이 들었지만 뒷감당이 두려워 마지못해 춤을 췄다. 이어 김씨는 A씨에게 “필리핀 여성 20명 정도를 데려와 술집에서 일하게 하고 네가 관리해 돈을 벌자”는 제안까지 했다.

이들 부부는 다음날 저녁 나이트클럽에서 일어난 일을 이유로 크게 다투게 됐다. A씨가 술집 운영제안을 거절하자 화가 난 김씨는 평소 집안에 보관하고 있던 수갑으로 A씨의 양 손을 결박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둔기를 휘두르며 때릴 듯이 위협을 가하고, 장난감 총을 들이대며 “마피아의 일원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도 한다”며 겁을 줬다.

이 같은 위협에 A씨는 “이대로 살다가는 아무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공포에 떨던 A씨는 김씨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재판부 “강도죄 성립 안 한다”

결국 A씨는 한국에 입국한지 2주 만인 지난해 10월 16일 오전 7시께 김씨에게 수면제를 탄 커피를 건넸다. 김씨가 잠이 들자 전날 미리 챙겨둔 현금 20만 원과 김씨 여권 등이 든 혼인서류를 챙긴 후 자신의 옷 등을 노트북 가방에 담아 집을 나갔다.

하지만 마땅히 갈곳이 없었던 A씨는 곧 남편에게 붙잡혔고, 강도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A씨는 재판에서 “김씨를 잠에 빠트리려고 수면제를 탄 커피를 건네줬으나, 김씨가 마시지 않았으며 김씨의 여권은 혼인서류를 보관하는 서류 사이에 끼어 있는 줄 모르고 들고 온 것”이라고 진술했다.

재판부는 “A씨가 학대를 받고 생명·신체에 위협을 느껴 김씨로부터 탈출해야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며 “수면제를 탄 커피를 주었다는 것만으로 반드시 강도의 고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A씨가 사건 전날까지 친구들과 주고받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에 도망치고 싶다거나 도망치기 전에 많은 돈을 훔쳐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으나, 사건 당일 도피자금이나 생활비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훔친 점은 인정되지 않는 상황”이라며 “강도의 고의로 피해자에게 수면제를 탄 커피를 건네준 점 또한 인정되지 않는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한편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의 ‘2010년 상담실적 분석’에 따르면 이주여성들의 상담유형은 폭력피해 12.89%, 부부가족갈등상담 23. 58%, 법률상담 19.57%, 체류·노동상담 18.74%, 생활문제상담이 26.10% 순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폭력피해상담은 6985건(12.89%)으로 2009년의 5,895건(13.57%)에 비해서 1090건(18.5%) 증가했다. 이 중에서 가정폭력은 4672건, 일반폭력은 233건, 보호시설 요청은 1826건이었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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