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죄와 벌 시한부 환자, 미궁 살인사건 자백후 숨져

말기암 피의자

[이창환 기자] = 암 투병 중이던 피의자 양모(59)씨가 지난 4월 12일 범행 사실을 자백한 뒤 8일 만에 숨졌다. 양씨는 2000년 11월 강천실업 직원이었던 김모(45)씨, 서모(48)씨와 같이 사장 강모씨를 둔기로 내리쳐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양씨 등 3명은 강씨에게 진 빚을 변제 받기위해 살해를 모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양씨의 증언을 토대로 강씨의 시신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다. 시신이 발굴 되는대로 김씨와 서씨의 혐의를 입증하는데 주력할 계획이다. 김씨와 서씨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2002년 단순가출로 종결된 미제사건이 유족들의 제보와 경찰의 재수사, 주범의 자백으로 실마리를 찾게 됐다.

지난 4월 12일 경찰은 양씨를 강씨의 생사와 관련된 유력 용의자로 보고 찾아갔다. 양씨는 경기도 용인의 한 요양원에서 말기 암 환자로 투병 중이었다. 양씨는 경찰의 질문에 숨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처음 양씨는 경찰에게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결국 눈물을 흘리며 지난 11년 간 담아뒀던 범죄를 자백했다.

양씨는 “내가 죽였다. 10년 동안 눈만 감으면 사장님은 물론이고 사장님 어머니 모습까지 아른거렸다”며 “죄책감 때문에 두려웠는데 자백하고 나니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양씨는 덧붙여 김씨와 서씨가 당시 자신과 함께 범행을 저지른 공범들이라고 자백했다.

자백을 마친 양씨는 지난 4월 20일 오전 사망했다.

양씨의 마지막 자백에 대해 네티즌들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만한 일이다” “죽기 전에라도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은 것은 다행”이라며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양씨의 범죄 때문에 겪었을 유족들의 고통을 공감했다.

네티즌들은 “용서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말길” “살인범은 언젠가 그 죄가 자신에 대한 벌로 돌아온다”고 말했다.

조사를 받던 양씨는 당시 “이 사실을 아들과 딸에게는 알리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결국 양씨의 유족들 또한 이 사실을 접하게 됐다. 양씨의 유족들은 “마지막에라도 털고 가는 것이 낫지 않느냐”며 허탈한 심정을 보였다.


악덕 사장 살해한 더 악덕한 범죄자들

2000년 초 강씨가 사장으로 있던 강천실업에 들어가기 전까지 양씨 등 3명은 택시와 덤프트럭을 운전하면서 생계를 꾸렸나갔다. 하지만 다들 형편은 여의치 않았다. 같이 몰려다니면서 상습적으로 도박을 해왔기 때문이다. 도박으로 쌓인 빚 때문에 이들 셋은 가진 돈을 모두 잃게 됐고 생계수단으로 사용했던 차까지 저당 잡혔다.

도박장에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강씨는 “빚지고 있던 돈을 대신 갚아줄 테니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게 어떠냐. 돈은 일하면서 갚아나가도 된다”며 이들을 꼬셨다.

강씨는 사채업도 활발히 진행하면서 재산을 축적하고 있는 중이었다. 불어난 도박 빚을 당장 갚을 길이 없었던 양씨 등 3명은 강씨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운전기사를 그만두고 강천실업의 직원으로 들어갔다. 강씨가 양씨 등 3명에게 빌려준 돈은 각각 3000~5000만 원 상당이었다.

하지만 폐비닐 공장이었던 강천실업의 일은 힘들었고 사장 강씨는 양씨 등 3명을 데려오자마자 함부로 대했다. 받는 월급에 비해 강씨에게 빚진 원금의 이자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때문에 강씨를 항한 이들의 불만이 점차 커졌다.

게다가 강씨는 언제 부터인가 양씨가 자신의 부인과 간통했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 의심 때문에 강씨와 양씨 관계는 더 악화됐다.

결국 양씨는 2000년 11월 김씨와 서씨에게 “강씨를 살해하자”고 설득했다. 평소 자신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이 기분 나빴고 대신 갚아준 도박 빚이 모두 1억1000만 원까지 늘어났기 때문이다.

양씨 등 3명은 강씨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난 금요일 밤 술을 자주 마신다는 것을 알고서 토요일 오전 2시, 강씨를 사무실로 불러들이기로 결심했다.

양씨는 “빚진 돈 중 일부를 구했으니 갚고 싶다”며 강씨를 유인했다. 강씨는 술이 많이 취한 상태로 사무실에 들어와 양씨 등 3명에게 “회부터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강씨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씨와 서씨는 강씨의 팔을 틀어쥐었다. 강씨는 놀라 버둥거렸고 양씨는 강씨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해머로 내리쳤다. 두개골이 함몰된 강씨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양씨 등 3명은 강씨의 금고에 있던 2억 원을 훔진 뒤 강씨의 시체를 김씨의 승용차에 실었다. 그리고 영월 방향으로 1시간 정도 이동해 시멘트 공장 인근 야산에 강씨의 시체를 암매장했다.


경찰은 포기해도 유족들은 포기 안 해

며칠 뒤 강씨의 유족은 강씨가 금고의 돈을 가지고 연락도 없이 사라지자 평창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했다.

평창경찰서는 거금이 사라진 점 때문에 범죄 가능성을 염두에 뒀지만 행방을 파악할 수 없어 단순 가출 사건으로 수사를 착수했다.

양모씨 등 3명은 경찰의 조사에서 “토요일 당시 자고 있었다”, “한동안 보지 못했다”는 말로 경찰의 수사망을 벗어났다. 경찰은 다른 주변 인물을 통해서도 강씨의 행방을 조사했지만 강씨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강씨의 가출 사건이 길어질수록 유족들은 양모씨 등 3명을 강씨의 살해범으로 의심했다. 이들이 강씨에게 1억 원이 넘는 돈을 빌렸기 때문이다.

유족들의 주장에도 당시 경찰은 이들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 경찰은 수사 한 달 만에 사건을 단순 가출로 내사종결했다.

유족들은 사건을 종결시킨 경찰의 결정을 납득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씨의 행방과 생사는 묘연해졌다.

2002년 강씨의 부인은 평창경찰서에 재수사를 요청했고 경찰은 재수사를 진행했지만 이마저도 별다른 진척 없이 난항을 겪다가 종결됐다. 유족들의 주장대로 양모씨 등 3명에 관한 수사 가 진행됐지만 또다시 아무런 범죄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이후 강씨 실종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게 됐다.

유족들은 강씨 사건이 단순 가출로 종결된 사실을 억울해했다. 이에 서울 곳곳의 경찰서를 찾아다니며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애썼다. 청와대에 진정서도 내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증거가 없는 유족들의 사연에 귀 기울이는 이들은 없었다.

그러다 강씨의 형은 성동경찰서에서 엄모 형사를 만났다. 엄 형사를 전부터 알고 있던 강씨의 형은 사건 서류를 엄 형사에게 건네면서 수사를 부탁했다. 엄 형사는 부탁에 의해 강씨 주변 인물들을 탐문수사하면서 기록을 검토했다. 이 과정서 양모씨 등 3명 역시 검토 대상에 올랐는데 엄 형사는 2003년 당시 이들이 중국으로 출국한 것을 포착했다. 강씨의 생사와 관련된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중국으로 떠난 이들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수사는 다시 멈췄고 엄 형사는 관련 서류를 서고에 넣어두게 됐다.


돈이 궁해 제 발로 수사망에 걸린 양씨

중국으로 도피할 당시 양모씨 등 3명은 다른 사기죄 혐의로도 수배 중이었다. 이때까지 이들은 전과 10~15범일 정도로 크고 작은 죄를 많이 지은 상태였다. 강씨에게서 훔친 금품은 도박과 경마장에서 탕진했고 이들은 또다시 빚더미에 올랐다.

양모씨 등 3명은 중국에 지내면서 흩어져 생활하거나 다시 뭉치기를 반복했다. 중국에서도 이들은 불법 오락실과 도박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4년 5개월을 중국에서 보내다가 이들은 2007년 국내로 돌아왔지만 귀국하자마자 사기혐의로 체포돼 징역 2년형을 받았다. 이후 양씨는 지난해 10월 교도소에서 출감했다.

출감한 양씨는 앓던 지병의 치료비와 생활비를 구할 궁리를 하다가 강씨 유족들을 생각해냈다. 강씨의 시신위치를 알고 있다고 연락해 돈을 타내기로 한 것이다. 자신이 직접 연락을 취할 수 없던 양씨는 중간책을 고용해 협상을 시도했다.

강씨는 곧바로 엄 형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강씨는 “어떤 사람이 시체 위치를 알려줄테니 보험금이 나오면 반을 달라고 했다”고 전하면서 중간책에 대한 수사를 요청했다.

경찰은 즉시 수사를 진행했고 찾아낸 중간책을 통해 “강천실업 전 직원이었던 양씨가 강 사장의 유골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에 경찰은 양씨의 행방을 추적해 양씨가 경기 용인시의 한 요양원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찾아낸 양씨는 위암 4기였고 거동도 제대로 못하는 상태였다. 중간책의 증언을 토대로 경찰은 양씨를 끈질기게 추궁했고 양씨는 죄를 시인했다. 11년 간 알 수 없었던 강씨의 생사가 피의자의 죽기 전 자백으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경찰은 나머지 공범인 김씨와 서씨에게 수사를 집중하고 있다. 양씨가 서씨와 이씨의 범행 여부 또한 자백했기 때문이다.

이에 김씨와 서씨는 살해현장과 암매장 장소에 함께 있었던 점은 인정했지만 적극적인 가담은 부인했다. 이들은 “양씨가 강씨를 둔기로 내리칠 당시 순식간의 일이라 말리지 못했다. 강씨를 붙잡는 행동 등으로 범행을 도운 적이 없다”고 말했다.

때문에 경찰은 양씨가 일러준 장소에서 시신을 발굴해 증거를 확보하는 일을 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자백한 범인이 죽는 바람에 난감해졌지만 유골을 찾은 뒤 김씨 등에 대한 구속영장을 다시 신청하겠다”고 말했다.

hojj@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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