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입양인 첫 국적회복 김대원씨 “이제 진짜 한국인”


[최은서 기자] = 5살 때 스위스로 입양된 김대원(43) 해외입양인연대 이사는 지난 4월 19일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김씨는 “오랜 꿈이 이루어져 가슴이 벅차다”며 “이제 진짜 한국인이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김씨뿐 아니라, 해외로 입양되면서 한국 국적을 잃은 해외입양인 12명도 새 국적법의 수혜자가 됐다. ‘입양인 복수국적 허용’에 관한 청원을 거듭한 끝에 이룬 성과다. 올 1월 1일부터 시행된 개정 국적법은 “한국 내에서 외국 국적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서약만 하면 복수 국적을 허용하고 있다. 김씨를 직접 만나 그의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5살이던 1972년, 김씨는 형과 함께 스위스의 한 가정에 입양됐다. 스위스에서 생활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양부모님은 사랑으로 키워주셨지만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더구나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김씨는 인종차별이라는 넘기 힘든 벽에 부딪쳤다.


노골적 인종차별 당해

당시 한국인은 커녕 동양인이라곤 찾기 힘들었던 스위스에서, 김씨는 인종차별을 온 몸으로 느끼며 자랐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당하면서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그는 “집에서만 스위스 사람이었을 뿐 외부에서는 완벽한 이방인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담담히 회고했다.

김씨에게 쏟아졌던 인종차별은 가슴 속에 큰 상처로 남았다. 그는 “검은 머리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며 “길을 걸어가다가도 내 머리를 함부로 만지고, 모욕적인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고 털어놨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고 해도 주문조차 받아주지 않는 경우도 겪었다. 또, 단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은 번번이 좌절당했다. 수십 장의 이력서를 낸 끝에 가까스로 면접을 보러가면 면접관들이 거부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는 “양부모님이 사랑으로 키워주셨지만, 양부모님도 백인이기 때문에 이런 고민들은 전혀 털어놓지 못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또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란 질문이 김씨에게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김씨는 자신의 출신을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입양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입양인라고 밝히면, 사람들이 거침없는 질문으로 나의 인생을 헤집었다”며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큰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 그에게 ‘자신의 정체성’이란 도무지 풀리지 않는 어려운 숙제였다.

정체성 고민에 빠지면서 낳아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갔다. 김씨는 친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꿈꾸면서 12살 때 스위스한인회 한글학교 문을 두드렸다. 다시 친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통역자 없이 직접 대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글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출신을 물어보는 사람에게 한국인이라고 말했다”며 “이때부터 입양 전 이름이었던 김대원이란 이름을 사용했고, 한국인이란 정체성이 생겼다”고 말했다.


새로운 꿈 ‘싱크탱크’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김씨는 1990년과 1994년에 한국을 2차례 방문했다. 1994년에는 꿈에 그리던 친어머니를 다시 만났다. 그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며 “친어머니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하자 양어머니는 ‘경쟁자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불편한 마음을 내비쳤다”고 회상했다. 2003년, 양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씨는 20㎏짜리 가방 하나만 짊어진 채 한국으로 귀국했다.

한국으로 귀국한 김씨는 해외입양인연대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김씨는 “2003년에 입양인 친구 중에서 한 명이 자살했다”며 “이 충격 때문에 다른 해외 입양인들이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해외입양인연대에서 활동을 하면서 그는 2007년 이중국적 캠페인과 2008년 5월에 전 세계 해외 입양인을 대상으로 복수국적 허용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한편 법무부에서 열린 공청회에 대표로 참석해 해외 입양인들의 여론과 복수국적을 허용해달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결국 5년의 노력 끝에 김씨는 스위스 국적과 한국 국적을 동시에 갖게 됐다. 김씨는 “복수국적 허용으로 한국사회는 다문화적 다양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씨가 한국 국적을 갖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국 여권’ 신청이다. 김씨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 여권’을 간절히 원해왔다고 한다. 어린 시절, 김씨는 여권만 있으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살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여권을 받게 되면 비로소 한국에 완전히 정착하게 됐다는 실감이 날 것 같다”고 환하게 웃었다.

이중국적이 허용됐지만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이 있다. 바로 병역문제다.

김씨는 “이미 입양된 나라에서 군대를 다녀 온 입양인이 한국 국적을 회복해 다시 병역 의무를 져야한다면 불공평한 일이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지금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그는 “한국과 스위스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며 “싱크탱크를 만들어 한국에서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복지, 환경, 인권 등 여러 분야를 싱크탱크를 통해 논의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싶다”며 “입양인, 외국인, 한국인 모두가 같이 논의하는 장을 만들어, 같이 토론하고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내 ‘윈-윈’ 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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