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선비정신의 원류…기개·절조의 최고봉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남명(南冥) 曺植(1501~1572) 선생은 한평생 열 차례 이상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한 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處士)로 자처하면서 학문과 제자들의 교육에 힘썼으나,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서릿발 같은 비판의 자세를 견지했다.

영남의 경상좌도에 퇴계 이황이 있었다면, 경상우도에는 남명 조식이 있었다. 퇴계의 제자들은 남인, 남명의 제자들은 북인 세력을 이루었다. 수제자 정인홍을 필두로 곽재우·김면·조종도·이노 등이 대표적인 남명의 문인들이다. 동갑내기인 퇴계가 이론에 치중하였다면, 남명은 실천에 무게를 두었다.

1555년, 조식은 단성현감을 제수 받았을 때, 단성현감 직을 사직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명종에게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인 ‘단성소’를 올렸다.

“(중략) 전하의 정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해버렸습니다. 천의(天意,하늘의 뜻)는 이미 가버렸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백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라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 까마득히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조정에 충의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이미 극에 달하였으므로 사방을 돌아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면서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 불리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중략) 자전(紫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일 뿐이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 고자(孤子, 고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백천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중략)”
이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아울러 명종을 고아로 대비(문정왕후)를 과부로 표현해 큰 파문을 일으켰지만, 서릿발 같은 선비의 기상을 잘 보여준다. 이 상소문을 접한 명종은 진노했다. 특히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직설적으로 폄하한 대목에 대해서는 “공손하지 못한 말이 대비에게 관계되는 것은 매우 통분(痛憤)하다. 임금을 공경하지 않은 죄를 다스리고 싶으나 빼어난 선비라고 하므로 내버려 두고 묻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당시 명종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 등 외척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죽음으로 불의와 맞선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처럼 남명은 불의와는 일체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선비정신의 원류를 보여줬다.

남명은 “멀리 보지 못하면 위난은 항상 가까이 있다”는 공자의 신념을 실천한 학자였다. 외환(外患)의 위기를 예상한 남명은 제자들에 유비무환 정신을 교육하여 사후 20년 후에 발발한 임진왜란에 정인홍, 곽재우를 포함한 50 명에 달하는 의병장들을 키운 것이다.

1561년, 남명은 지리산 천왕봉 아래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를 짓고, 오직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후에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고, 이황과 이언적 등 사림들이 그를 추천했지만 그는 한사코 사양하였다.

18세기의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조식은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 이라는 찬사를 부여하며 그의 우뚝 솟은 기개를 높이 평가했고, 『조선왕조실록』의 「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조용한 방에 단정히 앉아 칼로 턱을 고이는가 하면 허리춤에 방울을 차고 스스로 행동을 조심하여 밤에도 정신을 흐트린 적이 없었다. 천 길 높이 우뚝 선 기상이 있었고 꼿꼿한 절개로 악을 미워하였으며, 오직 학도들만이 종유(從遊,학덕이 있는 사람을 좇아 함께 지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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