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란 무엇인가” 되새김 해야
- 4남1녀 셋째아들 형제이름 중국 전설상의 ‘임금’본따

<통영 남망산 이충무공 동상>
 “국가란 무엇인가?”란 난데없는 질문이 작년 세월호 사건 이후,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져졌다. 국가가 국민에게 책임과 의무만 강요한 채, 국민의 생명과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또 그 누가 보았어도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전달되었던 무기력한 국가, 무책임한 국가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1년 반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는 또다시 혼돈의 도가니 속에 빠져들고 있다. 갑작스러운 국정교과서 논란  때문이다. 국가는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인가? 국가는 언제나 스스로 정의롭고 옳다고 이야기한다. 세금을 걷을 때마다 다양한 증거를 들이대며, 더 많은 세금을 강요하고 있다. 국가는 그동안 이 땅에 기적을 만드는 선도자였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국민들은 국가가 하는 말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기적을 만든 국가가 어쩌다 이렇게 불신의 대상이 되었을까? 수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굳지 하나하나 열거할 필요도 없다. 또 국민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최근 우리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수없이 많지만, 그 중 가장 큰 위협은 인구 감소와 경제문제이다. 2014년 출산율은 1.21이다. 2001년부터 시작된 초저출산(1.3명 이하)이 작년까지 14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우리사회의 합계출산율(가임기 여성 1명이 낳는 평균 자녀 수)은 1983년부터 인구대체 수준 이하로 떨어졌다.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00년부터 7퍼센트 이상인 고령화사회로 변했고, 2026년에는 20퍼센트 이상이 되는 초고령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일본보다는 무려 10년 이나 빠른 속도라고 한다. 뒤죽박죽이다. 뒤엉킨 실타래보다 풀기 어려운 난제들이 태풍이 마치 연달아 올라오는 형국이다.

 역사를 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아는 것은 반면교사를 하기 위함이다. 최근의 인구 감소와 관련해 가만히 지난 몇 십 년을 돌아보았다. 국가가 국민에게 요구했던 것을 각 시대의 대표적 표어를 통해 살펴보았다.

 1960년대,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기르자”. 1970년대,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내힘으로 피임하여 자랑스런 부모 되자”. 1980년대,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여보! 우리 하나만 낳읍시다”, “늘어나는 인구만큼 줄어드는 복지후생”,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부럽다”. 1990년대, “사랑모아 하나 낳고 정성으로 잘 키우자”, “사랑으로 낳은 자식, 아들.딸로 판단말자”. 2000년대 “한 자녀보다는 둘, 둘 보단 셋이 더 행복합니다”,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123운동(결혼후 1년내 임신하고, 2명의 자녀를, 35세 이전에 낳아 건강하게 잘 기르자”.

 표어들을 보니, 한 눈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국가가 어떻게 우리를 이끌어왔는지 들어온다. 우리 국민이 얼마나 착한지도 알 수 있다. 우리 국민들은 국가가 요구한 것을 언제나 순진하게, 열심히, 성실하게 따랐다. 국민들은 스스로 피임했다. 어느 한 시절에는 전국 곳곳의 예비군 훈련장이 피임 수술을 위한 공간처럼 변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저출산에 성공한 국가가 되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국가도 국민도 모두 행복해했다. 그런데 또 어느 순간, 출산율이 낮다고 비명을 지르며, 더 많이 낳아야 한다고 국가가 앞장서서 국민들의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10년, 20년을 바라보지 못하고 이랬다 저랬다 하고 있다.

 뛰어난 인재들이 국가를 운영하고 이끈다. 그래서 국가는, 정부는 국민 개인보다 뛰어나다. 국민들도 국가를 신뢰했고, 국가는 그 믿음에 부응해 기적을 만들었다. 그런 국가가 어쩌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다가 이제는 불신의 대상이 되었을까. 이번 호의 주제는 이순신의 형제들이기 때문에 잠시 오늘날을 돌아본 것이다.

▲ 1592년 1월 23일. 맑았다. 둘째 형님의 제삿날이라 좌기하지 않았다. 사복시에서 받아와 키운 말을 올려 보냈다.
▲ 1592년 1월 24일. 맑았다. 맏형님의 제삿날이라 좌기하지 않았다. 순찰사의 답장을 읽었다. “고부 군수 이숭고를 유임케 하는 장계를 올렸다가, 거듭 논박을 당해 사직서를 냈다”고 했다.

 1월 23일과 1월 24일은 각각 이순신이 위의 두 형님들의 제삿날을 기록한 것이다. 이순신은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24일이 제삿날인 맏형님 이희신(李羲臣)은 1587년 52세로 사망했다. 23일이 제삿날인 둘째 형님 이요신(李堯臣)은 1580년 38세로 사망했다. 이순신의 아버님은 1583년에 돌아가셨다. 때문에 맏형님 이희신이 1587년 사망한 이후 이순신은 사실상 이순신 집안을 이끄는 가장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장수로 변방을 전전했기에 가장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 할 수 없었다. 23일과 24일의 일기는 집안을 이끌 어른으로 책임감을 느끼며 돌아가신 형님들을 그리워하는 일기들이다. 

 이희신의 아들들인 뇌(1561~1648), 분(芬, 1566~1619), 완(莞, 1579~1627)은 《난중일기》에도 자주 언급된다. 이순신의 진영에서 활약하기도 했고, 진영을 왕래하며 이순신의 어머니의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이분의 경우는 훗날 이순신의 최초 전기인 《이충무공행록》을 저술해, 《난중일기》 혹은 《징비록》과 같은 기록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이순신의 어린 시절, 청년 시절, 초기 관직 생활, 그리고 현대의 우리들이 이순신에게 가장 감명받는 이야기 중의 하나인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란 이순신의 장계를 기록을 전해주기도 했다.

  둘째 형님, 이요신은 이순신의 후원자였던 류성룡과 친구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였고, 진사시험에도 합격한 촉망받는 인재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꿈을 펼치기 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들인 봉(&#33782;)과 해(&#33604;)도 이순신 진영을 왕래하며, 이순신을 도왔다.  이순신의 동생 우신(禹臣)은 현재까지 전해진 《난중일기》의 첫 기록인 1592년 1월 1일 일기에 ‘여필(汝弼)’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들 이순신의 형제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이순신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가장 잘 알 수 있다. 바로 그들 형제들의 이름이 모두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임금과 관련이 있다. 희신(羲臣)은 팔괘(八卦)를 처음 만들고, 그물을 발명하여 어업과 수렵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는 복희(伏羲)의 이름을 땄다. 요신(堯臣)은 역법(曆法)을 제정했고,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던 요(堯) 임금의 이름을 땄다. 우신(禹臣)은 중국 하(夏) 왕조 시조인 우(禹)임금의 이름을 땄다. 이순신은 요임금의 뒤를 이어 황하 범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수(治水) 사업을 성공시킨 순(舜)임금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순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순신의 형제들에게 훌륭한 사람들이 되라고 기대하며 그렇게 손자와 아들들의 이름을 지었다. 이순신은 홀로 형들 몫까지 다했고, 복희보다, 요보다, 순보다, 우보다 더 큰 역사를 썼다. 하나를 낳던, 둘을 낳던, 셋을 낳던 국가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한 명도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인 나라에서 더 말해 무엇하랴.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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