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자·형제·동지로서 역사 새로 써
- 권준·배흥립·김득광 이순신 다섯 아들 칭호

<한산바다에서 본 제승당>
한 사람의 영웅이 만들어지는 데는 수많은 조력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 조력자가 실제로는 진짜 영웅이라고 볼 수 있다. 영웅에 가려진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것도 후세인들의 책임과 의무이다. 1592년 1월 1일부터 전해지는 이순신 일기의 1월과 2월 일기에는 이순신을 만든 영웅들이 잇따라 등장한다. 1592년 1월 10일에 등장하는 방답첨사 무의공 이순신(李純信), 1592년 1월 22일에 등장하는 광양현감 어영담이 그들이다.

▲ 1592년 1월 26일. 맑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한 뒤, 흥양현감과 순천부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이날 등장하는 흥양현감은 배흥립(裵興立, 1546~1608)이고, 순천부사는 권준(權俊, 1541~1611)이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관할지역은 5관(官)인 순천·광양·보성·흥양·낙안과 5포(浦)인 방답·사도·발포·녹도·여도이다. 26일의 일기까지는 5관 중에서 광양과 흥양, 순천의 책임자가 등장했고, 5포 중에서는 방답첨사만 등장한다. 그러나 이날 까지 등장한 이들 4명, 그리고 2월 22일 등장할 녹도만호 정운(鄭運, 1543~1592), 3월 23일에 등장할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 ?~1606)까지 6명은 이순신 수군 지도부 중에서도 핵심인물들이다.

적장을 명중시킨 권준

특히 권준·배흥립·김득광은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월 27일 기록에도 이순신의 다섯 아들로 거론될 정도로 이순신의 최측근이다.  순천부사 권준은 《난중일기》에서 언경(彦卿)이란 자(字)로도 나온다. 45세 이순신이 1589년 정읍 현감에 임명되었을 때, 순천 부사에 임명되었다. 이순신과의 첫 인연은 이순신이 정읍현감에 임명되기 직전, 전라순찰사 이광의 색리 겸 조방장이었을 때였다. 당시 순천부사 권준은 종3품이었고, 나이도 4세 나 많았다. 종4품으로 순찰사의 참모였던 이순신보다는 여러 측면에서 우월한 입장이었다.

그 때문인지 조방장 이순신이 순천에 업무차 방문했을 때, 권준은 이순신을 가볍게 여기며 말했다. “이 고을은 아주 좋은 곳입니다. 그대가 내 대신 한번 맡아 다스려 보시겠소.” 그 때 이순신은 상급자인 권준의 농담반 진담반의 이야기를 가볍게 웃어 넘기고 말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 의도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상황이 역전되었다. 1월 26일 일기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관할지역 수령인 하급자 권준을 만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삶을 주관하는 신이 만든 새옹지마였다.

권준은 전쟁 발발 직후에 전라순찰사의 명령으로 육군에 배치되었기에, 1592년 5월 4일부터 전개된 이순신의 1차 출전에는 함께하지 못했다. 그러나 2차 출전부터는 전라좌수군의 중위장으로 참전해 대활약을 펼쳤다. 1592년 6월 2일의 당포해전에서는 일본군의 대선(大船)을 지휘하는 장수를 활로 명중시켰고, 대선을 격파했다. 이후 이순신과 함께 남해바다를 누비벼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594년, 권준은 탐관오리란 누명을 쓰고 암행어사 유몽인에 의해 순천 부사에서 파직되었다. 1595년 6월에는 경상 우수사에 임명되어 다시 이순신과 함께 동고동락했고,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충청수사 최호의 후임에 임명되기도 했다.

《난중일기》에 없는  명량해전의 영웅, 배흥립

흥양현감 배흥립은  《난중일기》에서 백기(伯起)란 자(字)로 나온다. 이순신보다 한살 적지만, 이순신보다 4년 먼저인 1572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왕을 경호하는 역할을 하는 선전관을 거쳐, 충청도 결성, 전남 장흥과 흥양의 현감을 역임했다. 이순신이 정읍현감에 임명된 시기에 흥양현감에 임명되었다. 광양현감 어영담처럼 바닷가 고을을 중심으로 관직생활을 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뒤부터는 이순신 막하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이순신의 1차 출전 때에는 전부장(前部將)으로, 2차 출전 때에는 후부장(後部將)으로 참전했고, 한산대첩과 부산해전에도 참전했다. 1597년 7월 원균의 칠천량 해전, 9월 이순신의 명량해전,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에도 참전했다. 남해바다의 전쟁터란 전쟁터는 다 경험한 백전노장이다. 게다가 이순신의 다른 부하장수들의 경우, 중간 중간 여러 가지 이유로 자리를 비웠지만, 배흥립은 언제나 이순신과 함께했다. 이순신의 첫 전투부터 이순신의 최후 전투까지 함께했다.

배흥립은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기인 1595년에는 이순신이 피난민 정착을 위해 조정에 건의해 실시한 둔전을 훌륭히 경영하기도 했다. 그래서 1595년 6월 6일의 《난중일기》에는 “흥양 현감(배흥립)이 그의 마음과 힘을 다했기에, 추수가 잘 될 것을 많이 기대할 수 있다”라는 평가가 기록됐다. 전시에는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앞장서서 싸운 명장, 평시에는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챙기는 살뜰한 경영자이며 행정가였다.

1596년에는 장흥 부사, 1597년 초에 경상 우수사에 임명됐다. 파직된 후에도 남해바다를 떠나지 않고 통제사와 수사를 돕는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활약했다. 원균의 칠천량 해전에도 참전했고, 이순신이 복귀한 뒤에는 아픈 몸을 이끌고 명량해전에 참전했다.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에도 참전했다.

명량해전이 기록된 《난중일기》에는 배흥립의 활약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선조실록》에 기록된 이순신의 명량해전 보고서 인용문에 따르면, 배흥립은 조방장으로 참전해 통제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김억추, 거제현령 안위와 함께 승리에 기여한 중심인물이다. 이순신의 장계에 추가로 언급된 다른 인물로는 녹도만호 송여종, 영등포만호 정응두 정도가 있다. 이로 보면, 배흥립은 명량해전에서도 이전의 전투에서처럼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위대한 영웅 이순신은 자신의 막하 장수들, 특히 권준·이순신(李純信)·어영담·배흥립·정운 등에 대해서는 “함께 같이 죽을 것을 기약하고, 모든 일에 대해 함께 논의하고 계획을 세워 추진했습니다(期與共死).”라고 했다. 영웅 이순신에게 그들은 상하관계가 아니라, 동지였고, 형제였고, 부자관계와 같았다. 그들과 함께 이순신은 역사에 기적을 썼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같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을 휘하에 둔 사람이 진짜 영웅이다. 작은 이익을 위해 하루살이처럼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세상사는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다. 영웅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사심이 넘쳐나기 때문인가?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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