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가로운 봄날, 바닷가에서 한숨을 돌
- 조선시대 자주 먹던 민물회…이순신도 즐겨

<단원풍속화첩 고기잡이 부분국립중앙박문관 소장>
1592년 1월 1일부터 기록된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정식 공무를 보지 않는 나라의 제삿날, 자신의 형님들의 제삿날에도 쉼 없이 일을 했다. 이순신은 한 달 내내 사람을 만나고, 공무를 처리하고, 활을 쏘고, 현장을 점검했다.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중에도 봄은 여지없이 찾아왔다.

▲ 1592년 2월 1일.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안개비(煙雨)가 잠깐 부슬부슬 내렸다. 늦게 갰다. 선창으로 나가 쓸 만한 판자를 골랐다. 때마침 수장안에 조어가 구름처럼 모였다. 그물을 쳤다. 2천여 마리를 잡았다. 장관이었다. 그대로 전선(戰船)에 앉아, 우후와 술을 마셨다. 더불어 새 봄의 경치를 구경했다.

《난중일기》의 날짜는 음력 기준이다. 때문에 이 날 일기의 2월 1일은 양력으로는 3월 14일이다. 남녘의 바닷가에는 이미 봄기운이 한창일 때이다. 바다를 지키는 장수 이순신은 이날 물고기를 잡는 곳으로 갔다. 수장에는 물고기가 가득 차 있었다. 수군들이 물고기를 잡는 것을 지켜보며, 기쁜 마음과 한가함에 젖어 우후와 함께 물고기를 안주로 술을 마시며 봄날을 즐겼다. 그에게는 1달 만의 휴식 아닌 휴식이 시간이었다. 7년 동안의 《난중일기》 전체 중에서 이 날의 일기처럼 이순신의 얼굴에 여유와 기쁜 미소가 엿보이는 날은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부채를 노획한 이몽구

우후(虞候)는 조선시대 무관으로 육군에서는 종3품, 수군에서는 정4품이 임명되었다. 육군의 병마사와 수군 수사의 직속 참모로 병마사와 수사의 지휘를 받아 군사에 관한 일을 다루었다. 이날 일기 속의 우후는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우후로 이몽구(李夢龜, 1554~1597)이다. 이몽구는 1591년에 이순신의 우후로 부임한 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의 막하에서 각종 해전에 참전했고, 이순신이 전사한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이몽구는 1592년 6월 2일의 당포해전 때, 일본군 장수의 배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황금부채를 노획했다. 그 부채는 히데요시가 일본 장수 가메이 코레노리(龜井玆矩)를 유구(琉球, 현재의 오키나와) 영주로 임명하는 임명장이었다. 코레노리는 이순신의 조선수군에 참패를 당하면서 그 귀한 임명장까지 챙기지 못하고 도망쳐야 했다.

조선시대의 어업과 생선회

이몽구가 노획한 황금부채는 히데요시의 야망을 꺾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 황금부채를 우리 후손들은 지키지 못했다. 이순신과 이몽구 등이 침략자를 격퇴한 지 318년 만에 우리나라를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들던 일본인에게  약탈되어 일본 왕실로 다시 돌아갔다. 1909년 9월 23일,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대한제국 탁지부 비밀 창고에서 황금부채를 찾아내 일본 왕실에 바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비밀창고가 갖고 있던 전설, 즉 창고의 문을 열면 흉변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적중했다. 세키노 다다시가 창고를 연 한 달 후인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고, 대한제국도 이듬해인 1910년 멸망했다. 치욕의 역사를 잊은 민족,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민족에게 주어진 하늘의 형벌이었다.

이순신은 전선(戰船) 위에서 수장 안에 가득한 물고기를 잡는 수군을 바라보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이날 일기에서는 조선시대 어업의 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일기에 언급된 수장이 그것이다.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는 어부들이 고기를 잡는 방식을 네 가지로 설명했다. 대나무 울타리를 만들어 길을 잃은 고기를 잡는 방식(어홍), 고기 떼가 지나가는 길목에 그물을 쳐 잡는 방식(漁隧, 어수), 바다 가운데 고기 떼가 모이는 곳에 그물을 치는 방식(漁場, 어장), 고기잡이에 적당한 곳에 배를 띄우고 여러 배를 날개처럼 벌려 고기를 가두어 잡는 방식(어종)이 그것이다. 그러나 《난중일기》 속의 수장과 같은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난중일기》 의 정황을 보면, 수장은 정약용이 말한 어홍 혹은 어장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함경도에서 군대생활을 했던 박취문의 1645년 8월 7일 일기에는 방전(防箭, 어살의 한자 표기)이 나온다. 방전은 어홍처럼 대나무 발을 활용해 고기를 가두어 잡는 방식이다. 또한 서유구(1764~1845)는 《난호어목지》에서 우리나라 서남해에서 어살로 고기를 잡는 법을 설명했다. 물이 얕은 바다 등에 대나무 대신 떡갈나무나 소나무로 말뚝 울타리를 설치해 두고 물고기가 갇히게 만든 뒤에 그물을 던져 잡는 방식이다. 청어나 조기를 주로 잡았다.

일기 속의 조어는 어떤 물고기일까. 번역자들은 ‘조’의 한문 본래 뜻인 ‘피라미’, 혹은 ‘숭어의 새끼(몽어, 몽치)’로 각기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몽어로 번역하는 근거는 피라미가 민물고기이기에 바다에 살 수 없다며, 피라미라는 한자의 뜻을 반영한 ‘새끼 숭어’로 본 것이다.

또한 《이충무공 진중일기》를 쓴 임기봉은 음력 2월은 여수 앞바다에 몽어떼가 모여드는 시기이고, 피라미 2천여 마리는 한 대야도 겨우 채우기 어려운 양이기에 일기 속의 표현인 “장관이었다.”가 성립될 수 없다며 ‘피라미’가 잘못된 번역이라고 보았다. 숭어는 실제로 《난중일기》 1596년 2월 6일에 ‘수어(秀魚)’란 이름으로 나오기도 한다. 반면, 이순신과 동시대 인물인 오희문의 1593년 6월 28일 일기에는 농어(蘆魚, 노어), 위어(葦魚)와 함께 조어가 별도로 나온다. 이로 보면 조어가 그 자체로 물고기의 한 종류일 수도 있다.

이와 달리 조선시대의 여러 문집에도 조어가 나오는데, 그 모두 물고기의 통칭처럼 사용되고 있다. 즉 《장자(莊子)》에 언급된 조어 때문이다. 장자가 물고기들이 노니는 것을 보고는, “조어가 나와서 조용히 놀고 있으니,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겠구나.”라고 하자, 친구 혜자(惠子)가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나”라고 비판한 것을 인용한 사례들이다. 이순신이 유학을 공부하고, 독서를 많이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장자》에서 언급된 것처럼 물고기의 통칭으로 조어로 기록했을 수도 있다.

조어가 피라미든 숭어 새끼이든 혹은 그 자체로 특정 물고기이든, 이순신과 이몽구는 그 날 배 위에서 술안주로 물고기 회를 먹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회(膾)가 마치 일본의 전통음식으로 생각되지만, 회는 조선시대 사람들도 아주 즐겼다. 민물고기 회도 많이 먹었기에, 민물고기 회를 먹어 생기는 간흡충(간디스토마)이 1400년대 인물인 정2품 어모장군 송효상의 미라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이순신,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을까. 그의 봄날은 그렇게 갔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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