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공민왕 때 수문하시중을 지낸 행촌(杏村) 이암(1297~1364) 선생은 「단군세기」 서문에서 ‘국유형(國猶形) 사유혼(史猶魂)’이라 하여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고 했으며, 나아가 “형체가 그 혼을 잃고서 어찌 보존될 수 있겠는가(형가실혼이보호形可失魂而保乎)”라고 했다. 이는 나라와 역사의 일체관계를 갈파한 만고의 명언이다. 역사를 알아야 나라의 정신이 바로 설 수 있는 법이다.

최근 역사 교과서 공방으로 날을 지세고 있는 정치권은 행촌의 역사관을 배워야 한다. 정체성이 무너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이념의 덫에서 역사 교과서를 해방시켜야 한다.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야권은 이념투쟁·장외투쟁에 나섰고, 교과서 문제를 정쟁(政爭)의 도구로 삼아 ‘역사전쟁’을 하고 있다. 아직 만들지도 않은 국정 교과서를 무조건 ‘친일 독재’ 교과서로 규정하고 국민을 선동하고 있다.

문재인 대표는 “아직 국정교과서가 집필도 안 됐는데 무슨 친일·독재 미화냐고 말하는데, X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느냐”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통준위 회의에서 “(확고한 역사관이 없으면) 통일이 되어도 우리의 정신은 큰 혼란을 겪게 되고 중심을 잡지 못해 결국 사상적으로 지배를 받게 되는 기막힌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한 점을 야당 지도자들은 경청해야 한다.

동아일보가 바른사회시민회의, 법률소비자연맹 등과 조사한 결과 의원입법 가결률은 16대 국회 27%, 17대 국회 21.2%, 18대 국회 13.6%, 19대 국회 11.5%로 19대 국회가 역대 최저 수준이었다. 이는 국회의원의 질이 점점 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19대 국회가 역대 최악의 국회가 될 수 있다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19대 국회의 현주소(문제점)를 한번 살펴보자.

첫째, 연봉은 세계 최고지만, 의회 경쟁력은 세계 최하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연봉(세비 1억 5천여만 원, 9명의 보좌진, 각종 특혜)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 대비 5.3배로 일본(5.7배), 이탈리아(5.5배)에 이어 세계 3위다. 그러나 ‘의회 효과성’에서는 분석 가능한 27개국 중 26위다. 본회의 표결 참여 의원 비율도 64.8%로 글로벌 스탠더드에 한참 못 미친다.

둘째, 국민의 국회 불신 비율이 80%를 넘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기관·단체에 대한 신뢰도 조사에서 입법부는 조사 대상 13개 중 최하위의 신뢰도를 기록했다. ‘신뢰한다’는 응답은 17.4%에 그쳤다. 19대 국회에서 국회의원의 200여 개 특권 중 제도적으로 폐지된 것은 ‘의원연금’ 정도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셋째, 국민은 현역의원 대폭 교체를 바란다. 현역 국회의원 교체(물갈이) 폭은 총선 때마다 단골 메뉴가 된다. 국회 불신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이다. 여론조사 응답자의 47%는 ‘다른 사람이 당선됐으면 한다’고 답했고, ‘현역의원이 다시 당선되는 것이 좋다’고 응답한 사람은 24%에 불과했다. 정치판 물갈이를 하겠다는 국민의 뜻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넷째, 국회의원 정수를 줄이라는 게 국민의 뜻이다. 국회의원 1명을 대표하는 국민의 수는 한국이 16만 명으로 일본의 26만 명, 미국의 70만 명에 비해 월등히 많다. 총선이 5개월여 앞으로 다가왔지만 선거구 획정은 못하면서, 야당은 의원정수를 늘리려는 꼼수를 부리고 있다. 이탈리아는 최근 정치개혁을 위해 상원 정수를 315명에서 100명으로 줄이고 각종 특권을 폐지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우리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20대 국회가 19대 국회의 질곡(桎梏)에서 벗어나 개혁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19대 국회의 반대로 하면 된다. ‘경제는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 라는 말이 나온 지 20년이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국회 스스로 과감한 자기개혁에 나서서 세계 최악의 국회라는 오명을 씻어야 한다. 국회가 환골탈태(換骨奪胎)하지 못하면 국민이 나서야 한다. ‘이것만은 달라져야 한다’고 국민이 세차게 요구해야 한다.

첫째, 국민은 새정치, 새인물에 대한 열망이 매우 크다. 문제는 물갈이 폭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덕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미래지향적 새 정치인’을 발굴하는 일이다. 유능한 인재들이 국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분위기를 여야가 경쟁적으로 조성할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한다.

둘째, 국회의원의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야 간 극한 대립과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연봉은 많이 받고 일은 적게 하는 국회의원 세비도 삭감해야 한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약속한 국회의원 특권 포기 및 국회·정치개혁 공약이 지켜질 수 있도록 압박해야 한다.

셋째, 국회 부실을 예방해야 한다. 정국의 파행은 국민에게 고스란히 피해로 돌아온다. 국회에는 노동·금융 등 4대개혁 법안과 각종 민생법안, 내년 예산안 심사 같은 현안들이 쌓여 있다. 19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가 표류하면서 국정 주요 현안이 졸속 처리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결국 지금 우리에겐 보수도 진보도 아닌 연암 박지원의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잠곡 김육의 ‘안민익국(安民益國)’의 정치가 필요하다. 역사전쟁에만 매몰돼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오명을 남기지 않으려면 19대 국회가 남은 기간 동안 민생 최우선 의정에 매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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