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로 ‘시무28조’ 통해 고려 정치이념으로 실현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은 6두품 출신으로 신라 하대에 골품제도를 비판하고 중앙집권적인 유교정치의 실현을 주창했으며, 유교·불교·도교에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다. 6두품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신라 17관등 가운데 6등위에 해당하는 아찬 이상의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다. 반면 당나라는 외국인에게도 관직의 문이 열려 있고 능력에 따라 높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837년 한 해 동안 도당(渡唐) 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 신라에서는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

868년 아버지 최견일(崔肩逸)은 더 넓은 세상에서 큰 꿈을 펼치기 위해 당 유학길에 오르던 12세 아들 최치원에게 “10년 공부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다. 경주최씨 가문의 자부심과 6두품의 한과 비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최치원은 유학 6년 만인 18세(874년) 때 빈공과(賓貢科)에 장원 급제한 후 약관 20세(876년)에 첫 관직(율수현위)에 오를 만큼 학문이 출중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가리켜 “짧은 두레박줄은 깊은 우물물을 길을 수 없고 무딘 창은 굳은 것을 뚫을 수 없습니다”라며 겸손했지만, 재능은 난세에 빛을 발했다.

‘황소의 난’을 일으킨 황소(黃巢)가 수도 장안까지 점령한 881년. 토벌군 사령관인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 복무하던 최치원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당나라 전역에 알리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었다.

훗날 고려의 이규보는 “황소가 격문을 읽다가 ‘온 천하 사람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아마 지하의 귀신들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라는 구절에서 너무 놀라 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며 칭송했다.

최치원은 884년(헌강왕8) 28세 청년이 되어 16년 만에 귀국했다. 당 황제가 ‘자금어대(紫金魚袋, 정5품 이상에게만 주는 붉은 주머니)’를 하사할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풍전등화 같은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신라 하대의 혼란은 진성여왕(887~897) 때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중앙귀족들은 부패하고 사치와 향락에 적어 있었다. 국가재정은 궁핍해지고, 지방에서 조세와 공부(貢賦)가 걷히지 않으며, 각지에서 도적이 봉기하여 마침내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각기 건국을 하고 세력을 굳혀가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최치원은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894년(진성여왕 8) 2월 신라사회 개혁안인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진성여왕에게 올렸다. 내용은 전하지 않지만 학자들의 추측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골품제를 완화하고 과거제에 의한 인재등용을 하라는 건의 등이 피력되었을 것이다.”(하현강 「한국의 역사」)

둘째, “신라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합리적인 유교정치의 실행을 요구한 것이다. (중략) 새로운 중세국가 건설의 방향을 제시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던 것이다.”(변태섭 「한국사통론」)훗날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십여 조를 여왕에게 간했으나 여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연암집」)며 안타까워했다.

최치원은 결국 898년 42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가야산에 은거하였고, 개혁을 거부했던 천년 왕국 신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삼국사기>는 열전에서 최치원을 두고 “서쪽에 가서 당나라를 섬기다가 동쪽 고국으로 돌아오니, 모두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움직이면 문득 허물을 얻게 되었다. 스스로 때를 만나지 못함을 슬퍼하며, 다시 벼슬할 뜻을 품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며 산림 아래와 강가·바닷가에 누정을 짓고 솔과 대를 심었으며 책 속에 파묻혀 풍월을 읊었다. 경주 남산, 강주 빙산, 합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의 별서가 모두 그가 거닐던 장소다”라고 적었다. 이러한 최치원의 개혁사상은 당대엔 좌절됐지만, 유교에서 그의 선구적 업적은 훗날 자신의 증손(曾孫)인 최승로(崔承老)의 ‘시무(時務) 28조’를 통해 고려의 정치이념으로 실현되었다.

최치원은 ‘나말여초’라는 역사적 전환기의 정치사상적 변화를 대변한 시대정신의 산 증인이었다. 이후 최치원은 한국유학사상 최초의 도통으로 모셔지고 있으나, 사실 그의 사상은 유교와 불교, 도교를 통합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시진핑 주석은 최근 ‘2015 중국 방문의 해’ 행사에서 축하메시지를 통해 “동쪽 나라의 화개동(지리산 쌍계사와 칠불사 계곡 일대)은 호리병 속의 별천지(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라는 시구를 직접 소개하며 “한국의 시인 최치원이 한반도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칭송했다”고 말했다.

그는 2013년 6월 중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도 최치원의 한시(漢詩) ‘범해(泛海)’를 인용했으며, 지난해 7월 서울대에서 가진 특강에서도 최치원을 한중 양국관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거론한 바 있다.

이처럼 최치원 선생은 사후 1,100년이 지난 시점에 한·중 우호 증진과 문화교류 촉진의 주인공으로 부상(浮上)하고 있으니,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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