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고기를 잡아 군량을 마련하다
- 연말·연초 청어, 2월 숭어와 조기 잡기

<수(帥) 깃발(통영 세병관)>
1592년 2월 1일, 이순신은 수군들이 물고기를 잡는 곳에서 풍어 현장을 지켜보며, 봄볕을 즐겼다. 또 기쁨 가득한 미소를 띠고 물고기를 안주삼아 술을 마셨다. 이순신에게 물고기는 단순한 물고기가 아니었다. 특히 군량이 절대 부족했던 전쟁시기에 물고기는 이순신과 수군의 생명줄이었다.

▲ 1595년 11월 21일. 이날 저녁에 벽어(碧魚) 13,240 두름(두름은 물고기를 한 줄에 10마리씩 두 줄로 엮어 20마리씩 묶어놓은 단위)으로 곡식을 사는 일로 이종호가 받아 갔다.

▲ 1595년 12월 4일. 황득중과 오수 등이 청어(靑魚) 7000여 두름을 실어 왔다. 그래서 김희방의 곡식 판매 배에 계산해 주었다.

▲ 1596년 1월 6일. 오수가 벽어 1,310두름, 박춘양이 787두름을 바쳤다. 하천수가 받아다가 말렸다. 황득중은 202두름을 바쳤다.

수군이며 어부였던 수군

이순신의 수군이 물고기를 잡아 팔아서 군량을 마련한 일기들이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는 모습들이다. 이순신은 육지 백성에게 군량을 공급받기도 했지만, 바닷가의 장점을 활용해 스스로 군량을 마련했다. 어부 이순신은 소금을 굽거나, 질그릇을 구워 팔기도 했다. 전쟁의 고통으로 백성들이 굶어죽는 상황에서 백성들을 살리고 군대를 먹여 살리기 위한 지혜였다.

그는 또한 어부가 된 자신의 군사들을 배려했다. 1596년 10월 11일 일기 이후에 기록된 메모를 보면, 수군 어부들을 포상하기 그들의 이름을 각각 기록해 놓았다.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들을 잊지 않고, 격려하기 위한 조치였다. 위 일기 속의 인물들인 이종호·황득중·오수·박춘양 외에도 ‘송한련·송한·송성·유충세·강소작지·강구지’ 등이 어부로 활약했음을 메모로 알 수 있다.

군량…청어·대구·숭어·조기

《난중일기》 속에 언급된 이순신 수군이 잡은 주요 물고기는 위의 일기 속에 나오는 벽어(碧魚), 거구(巨口, 1594년 11월 5일), 수어(秀魚, 1596년 2월 6일), 석수어(石首魚, 1596년 2월 17일) 등이 있다. 이중 벽어가 가장 많이 나온다. 벽어는 《난중일기》 1595년 12월 4일 일기처럼 청어(靑魚)이다. 우리나라 서남해에서 많이 잡히는 물고기다.

《자산어보》의 정약전에서는 “1월에 알을 낳기 위해 바닷가를 따라 무리 지어 올라오는데, 청어 무리 수 억 마리가 열을 지어오면서 바다를 뒤 덮을 지경”이라고 했다. 《명물기략》에서는 ‘비유어(肥儒魚)’라는 별명으로 나온다. 값이 싸고 맛있어 가난한 선비들을 살찌게 하는 물고기라는 의미다. 겨울에 잡은 청어를 그대로 그늘에 말린 것을 과메기라고 부른다.

거구(巨口)는 대구다. 대구에 대해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는 우리나라 동해에서 나는 물고기로 중국 사람들이 그 맛을 귀히 여기기에 북경에 가는 사람들이 사간다고 했다. 《자산어보》에서는 “대두어(大頭魚) 또는 무조어(無祖魚)라고 칭하면서, 무조어라고 한 것은 대구가 그 어미를 잡아먹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시대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에서는 대구껍질느르미와 대구껍질채의 주재료로 사용되는 물고기라고 하고 있다.

수어(秀魚)는 숭어이다. 2월 1일 일기 속의 조어가 바로 그 ‘새끼 숭어’일 가능성이 있다. 석수어는 조기이다. 《자산어보》에서는 전라도 흥양 바깥 섬에서 춘분이 지나면 그물로 잡고, 칠산 바다에서는 한식 이후에 그물로 잡는다고 했다. 이것을 건조시킨 것이 ‘굴비(屈非)’다.

굴비란 명칭은 고려 인종 때, 이자겸으로 인해 생겨났다고 한다.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고 실패한 뒤 지금의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가 말린 조기를 먹고는 임금에게 진상케 했고, 임금 역시 그 맛에 감동해 유배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자겸이 말린 조기를 진상할 때, 자신의 뜻을 ‘굽히지(屈) 않겠다(非)’는 의미를 담아 말린 조기에 ‘굴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영광 법성포 조기는 조선 시대에도 유명했다. 1480년대 전라관찰사로 법성포를 시찰했던 김종직은 3~4월에 각 지방의 장삿배들이 이곳에 모여 조기를 잡아서 말렸는데, 서봉 아래에서 꼭대기까지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같은 이야기가 《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온다. “매년 봄이면 전국의 장삿배들이 모여들어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팔았는데, 서울의 시장과 같이 시끌벅적했다.”

《난중일기》 속 어업 사례를 살펴보면, 이순신의 수군은 농한기라고 할 수 있는 겨울철과 초봄에는 물고기를 잡는 데 집중했다. 연말과 연초에는 청어, 2월에는 숭어와 조기를 잡았다. 한편에서는 전투를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불철주야 경계를 하면서 농사철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물고기를 잡았던 쉴 틈 없는 이순신과 그의 수군은 그렇게 기적을 만들어갔다.

끝없는 전쟁 준비

이순신은 2월 1일의 어부 활동을 끝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전쟁준비에 몰두했고, 스스로 무예를 연마했다. 《난중일기》에는 활을 쏘는 이순신의 모습이 빈번히 나온다. 1592년 1월 12일 일기에 처음으로 활쏘기 기록이 나오지만, 이순신 자신의 활 쏘기는 아니다. 장교들의 활 쏘기 시험을 보았다는 기록이다.  이순신의 첫 활쏘기 기록은 2월 2일이 시작이다.

▲ 1592년 2월 2일. 맑았다. 동헌에서 공무를 처리했다. 쇠사슬을 가로로 설치하기 위한 큰 돌덩어리와 중간 돌덩어리 80여 개를 실어왔다. 활 10순을 쏘았다.

▲ 1592년 2월 5일. 맑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한 뒤, 활 18순을 쏘았다.

이순신은 공무를 처리하고 전쟁준비를 점검하고, 그런 뒤에 활을 쏘았다. 일기에 기록된 활 쏘는 단위인 1순은 화살 5대를 뜻한다. 2월 2일에는 50발, 2월 5일에는 90발을 쏘았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이순신의 최대 활쏘기 기록은 1595년 5월 19일의 30순(150발)이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최고 책임자였지만, 그 스스로 군인으로서 무예를 갈고 닦았다. 그것도 활쏘기가 우선이 아니라, 좌수사로서 급한 공무를 먼저 처리한 뒤 여가시간을 활용해 쏘았다. 똥배 나온 장수, 화살 한 발 제대로 못 쏘는 장수가 아니었다. 행정을 우선해 책상에서 지시만 하고, 전략전술만 짜면서 실전 무예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활을 쏘며 용기를 키웠고, 몸을 다스렸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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