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아웅산 수치(70)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11월8일 실시된 총선에서 국회 의석 3분의2 이상을 확보, 압승했다. 25년 만의 자유 총선에서 문민정당이 군부독재를 눌렀다. 1962년 네 윈 장군 쿠테타 이후 53년 지속된 군부독재가 종장에 이르렀다.

1948년 영국에서 독립한 미얀마는 1인당국민소득(GNI)이 1200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군사정권은 ‘절대권력은 절대 썩는다’는 말처럼 절대 썩었고 절대 무능했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대학 시절부터 미얀마 독립운동의 지도자였고 집권을 1년 앞두고 1947년 암살당한 독립운동 영웅 아웅 산의 딸이다. 아웅산 수치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유학중 티베트 불교를 전공하는 동급생이었으며 1년 연하인 영국인과 결혼, 아들 둘을 두고 있다. 남편은 박사학위를 받고 학자로 활동하던 중 1999년 병사했으며 두 아들은 영국 시민권 소유자이다.

아웅산 수치는 1988년 초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잠시 미얀마로 귀국했다. 그러나 그해 8월8일 수천 명을 학살한 군부의 반정부 ‘8888시위’ 진압을 보고 영국 귀환을 포기, 정치에 뛰어들었다. 다음 해 군부에 의해 가택 연금되기 시작, 27년 동안 반군부 민주화 운동의 “어머니”로 떠올랐다. 1990년 NLD를 이끌고 총선에서 승리, 집권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군부의 거부로 권좌에 오르지 못했다. 15년간 가택 연금되었다가 2010년 풀려나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아웅산 수치는 11.8 총선에서 압승했으므로 당연히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미안마 헌법 59조에 묶여 대통령이 될 수 없다. 외국 국적의 남편과 자녀를 둔 사람은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다. 군부가 아웅산 수치를 겨냥해 만든 헌법이다. 아웅산 수치는 집권한다 해도 군부가 핵심 부서인 내무부장관, 국방부장관, 국경부(國境部:외교부)장관을 임명하고 상·하 양원 의원도 25%를 배정한다. 그래서 반쪽 집권으로 그친다. 그는 대통령이 되려면 헌법을 뜯어고쳐야 한다.

앞으로 반쪽 집권으로 그칠 아웅산 수치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째 선택은 군부 세력에 대한 피의 보복이다. 그러나 군부와 맞서면 군부의 쿠테타를 면할 수 없다.

두 번째 선택은 199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처럼 증오를 내려놓고 화해하며 타협하는 길이다. “국민 대화합”이다. 만델라는 집권 후 피비린내 나는 보복 대신 “국민 대화합‘의 길로 나섰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만들어 과거 백인들의 잔혹한 범죄를 규명하되 가해자들을 용서했다. 아웅산 수치도 만델라와 같이 화해와 용서의 길로 나서야 한다.

이제 아웅산 수치의 지도력이 시험대 위에 서게 되었다. 그는 잔혹했던 군부를 용서할 경우 성급한 민주화 지지 세력의 반발에 부닥치게 된다. 반대로 군부를 가혹하게 숙청하게 되면 군부의 쿠테타를 피할 수 없다. 그는 앞으로 군부 숙청과 대화합,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만델라처럼 “국민 대화합”으로 가야 한다.

아웅산 수치는 총선에 압승하자마자 “승자는 겸손해야 한다.”며 승자의 오만을 거부하며 패자에 대한 배려를 표방했다. 그가 대화합 쪽으로 기울었음을 엿보게 한다. 미얀마 국민들도 자유라는 이름 아래 후진국 국민들이 그러는 것처럼 법과 질서를 짓밟으며 방종해서는 아니 된다.

만델라는 남아공에서 “마디바(존경하는 어른 또는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아웅산 수치도 미얀마 대화합의 ”어머니“로 모두를 품어야 한다. 만델라는 27년의 옥고를 치렀고 아웅산 수치도 27년의 험난한 민주화 역경을 걸었다. 둘은 노벨 평화상도 탔다. 아웅산 수치도 만델라처럼 인류 모두가 존경하는 대화합의 큰 정치인으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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