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정’ 내세워 나라 전반 개혁 주장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을파소(乙巴素, ?~203)는 5000년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명재상들의 태두(泰斗)이자 단군 이래 최고의 국상(國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을파소는 압록곡(鴨綠谷) 좌물촌(左勿村, 평북 선천)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다. 아버지는 외척들의 미움을 사 파면 당한 서하(西河, 섬서성 북부) 태수 을어(乙魚)다.

아버지의 강직한 성품을 물려받은 을파소도 외척들을 혐오하며 좌물촌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태공망(太公望)처럼 나이 50이 넘도록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을파소는 학문과 병법에 일가를 이루어 세상 사람들이 “이윤(伊尹)이나 여상(呂尙)같은 인물이 시골에서 썩고 있다”고 아쉬워하였다.

미천한 가운데서 발탁한 훌륭한 인재를 뜻하는 말이 ‘이려(伊呂)’다. 은(殷)나라 탕왕(湯王) 때의 재상인 이윤과 주(周)나라 문왕(文王)·무왕(武王) 때의 재상인 여상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한국의 재상 태두인 을파소는 중국의 재상을 대표하는 태공망과 닮은 점이 많다. 낚시꾼의 대명사인 ‘강태공’으로 불리는 태공망은 80세에 주나라 문왕을 만나 무왕을 도와 주나라 천하를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을파소는 50세가 넘어 고국천왕을 만나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강화하여 고구려의 강성대국 기틀을 만들었다.

이 두 사람은 인생 후반에 뜻을 이룬 ‘인생 이모작’에 성공한 명재상이다. 태공망은 《육도삼략(六韜三略)》이라는 경세제민과 부국강병을 위한 병법서를 남겼으며, 을파소도 참다운 삶의 도리를 통한 국가경영 철학서인 《참전계경(參佺戒經)》을 남겼다. 또한 태공망은 주나라 문왕과 무왕을 대를 이어 보좌했으며, 을파소도 고국천왕과 산상왕을 대를 이어 섬겼다.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 재위:179〜197)은 부족적 전통의 5부를 방위로 표시하는 행정적 성격의 5부로 바꾸었다. 또한 왕위계승 방식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왕권 강화를 바탕으로 중앙집권화를 더욱 진전시켜 고구려를 고대 동북아 으뜸 국가로 만드는 초석을 쌓았다.

서기 191년(고국천왕13) 4월. 고국천왕은 각 부(部)로 하여금 유능한 인사를 천거케 명령을 내렸다. 5부의 사람들은 동부 출신의 안유(晏留)를 추천했다. 그러나 안유는 이를 사양하고 을파소를 다시 천거했다. 고국천왕은 안유의 말에 따라 예를 갖추어 을파소를 모셔오라고 명했다.

고국천왕은 을파소에게 우태(于台)라는 작위를 수여하고, 중외대부(中畏大夫, 장관급)로 임명하였다. 고국천왕은 벼슬 경험이 없는 을파소를 먼저 써보고 때를 보아 국상으로 임명할 생각이었다. 을파소는 고국천왕의 의도를 꿰뚫고 있었다. 중외대부 벼슬로는 외척과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누르고 정치개혁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을파소는 고국천왕에게 다시 아뢰었다.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감히 대왕의 엄한 명령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원컨대 현명한 사람을 뽑아서 그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큰일을 이루게 하십시오.”

그 신하의 그 왕이었다. 명석한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기백과 포부를 높이 평가하여 마침내 농사꾼 출신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국상(國相)에 임명했다. 손자병법의 핵심 교훈은 ‘대여대취(大予大取)’라 할 수 있다. 즉 “크게 주고 크게 얻으라”는 것이다. 뛰어난 인재를 얻고자 하면 큰 ‘미끼(높은 관직)’를 써야 한다. 고국천왕은 이를 알았던 것이다.

을파소는 개혁의 전권을 쥐게 되자 ‘칠정(七政)’을 내세워 나라의 전반을 개혁했다. ‘칠정’이란 천체운행의 원리를 정치에 비교하여 치도(治道)로 삼은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존군(尊君), 군주를 존중하고 둘째 정민(正民), 백성을 바로잡고 셋째 용현(用賢), 현명한 자를 기용하고 넷째 훈육(訓育), 가르쳐 길러내고 다섯째 양재(養才), 인재를 양성하고 여섯째 농렵(農獵), 농사와 사냥을 권장하고 일곱째 변새(邊塞), 국경을 튼튼히 하는 것이었다.

을파소는 194년 빈민들에게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 추수기에 갚는, 빈민구제정책의 효시가 된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했다. 진대법은 봄에 국가가 관리하는 곡식을 백성들에게 가족의 수와 연령, 필요한 식량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빌려주고, 가을에 빌려준 곡식을 되돌려 받는 제도다.

진대법은 ‘춘대추납제(春貸秋納制)’의 기원으로 빈민구제 목적도 있었지만 춘궁기 농민들이 식량부족으로 고리대를 이용하고 갚지 못해 귀족의 노비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민생 개혁정책이었다. 이처럼 진대법은 안류의 양보, 을파소의 배포, 고국천왕의 결단 3박자가 어우러져 탄생하게 됐다.

최근 ‘승핍(承乏, 쓸 만한 인재가 없어서 재능이 없는 사람이 벼슬을 함)’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한민국이
다. 명재상 관중(管仲)은 “천하에 신하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신하를 적절히 쓰는 군주가 없는 것을 걱정하라”고 했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우리나라 역사 속의 위인들로 정부를 꾸며봤다. 이 대단한 위인들을 이끄는 국무총리가 고구려의 국상 을파소다. 대통령비서실장 이제현, 외무부 장관 서희, 국방부 장관 을지문덕, 교육부 장관 설총, 해군참모총장 이순신, 전권대사 정몽주, 서울대총장 이황, 하원의장 이율곡, 감사원장 조광조를 꼽았다.

이렇게 역대 최강의 화려한 드림팀 진용을 구축한다면, 다른 나라가 감히 우리나라를 가볍게 넘볼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국민통합을 바탕으로 선진·통일로 나가는 국가목표 달성이 한층 수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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