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은 11월22일 패혈증과 급성신부전을 이겨내지 못하고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에서 멸치잡이로 성공한 부잣집의 3남5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6세 되던 해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소속으로 총선에 출마,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 후 1992년 총선 까지 모두 아홉 차례 국회의원에 피선되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이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을 강행하자 자유당을 탈당, 험난한 “민주투사”의 길로 들어섰다. 1963년 5.16 군사 쿠테타 세력의 군정연장 반대 시위에 앞장섰다가 구속되었고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괴한들로부터 초산테러도 당했다.

김 전 대통령은 신민당 총재로서 1979년 ‘YH여공 신민당사 농성’을 보호했고 그 때 미국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철회를 주장, “반국가적 언동”으로 몰려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그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구를 남겼다. 1990년 자신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 2년 후 대선에서 평민당의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이 군사정권과의 야합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여 승부수를 던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 투사였지만, 투사형 싸움판 정치인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인간성을 지녔다. 그는 독재자와는 타협하지 않고 직선적이었으면서도 부드러운 감성의 소유자였고 거짓말 하지 않으며 신의를 지키는 등 인간의 근본을 지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늘 마땅치 않게 여겼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에게 퍼주고 비위맞춰주며 끌려다니자 2000년 8월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을 통해 격렬히 비난했다. 그는 “김정일이 통일 정부 대통령이고 (김대중 대통령은)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지않나”며 “지금 김정일이 남북통일 정부의 대통령이다. 김대중씨는 총리도 안 되고 장관 정도이다.”고 힐난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00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걱정되는 것은 청소년들이다. 거짓말 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니 청소년들이 이제 나도 거짓말을 하겠다고 잘못 생각할까 걱정이 된다. 근본적으로 의리 없고 거짓말 잘하는 사람은 절대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고 언성을 높였다.

민주투사로 대통령에 오른 사람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세 사람이다. 셋 중 김대중과 노무현은 인간적으로 근본이 안 된 사람이라고 자주 훼자되었다. 김대중 씨는 의리 없고 “입만 열면 거짓말 한다”고 조롱되었고 노무현 씨는 “근본이 안 된 사람”이라고 폄훼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중인 2004년 7월 “나와 열린우리당 사람들에 대해 근본이 안 된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자인했다. 그밖에도 노 전 대통령에 대해선 “운동권 3학년 수준”이라는 비아냥도 쏟아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투사로 거칠게 살았으면서도 인간의 근본을 잃지 않았다. 정직하고 원칙·신의를 지켰으며 내면이 부드러웠다. 그는 야당의원 시절 자주 찾던 설렁탕집에 가면 주방에 들어가 주방장과 악수를 하곤 했다고 한다. ‘YH 여공 신민당사 농성’때 김 전 대통령을 만난 한 여공은 김 전 대통령이 “외부엔 투사 이미지가 강했을지 몰라도 눈매나 말투 등에서 보듯 선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지역과 세대를 초월해 우리 국민 모두가 김 전 대통령의 타계를 마음속 깊이 애도한다. 그 이유는 그가 다른 대통령들과는 달리 인간의 근본을 갖춘 정치인이었다는데 연유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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