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군이 만든 조총, 일본군 총보다 성능 월등
- 조선 봉수 시스템 최전방 전선 크게 활약


<조총, 전쟁기념관>
이순신 하면 금방 떠오르는 것이 거북선이다. 거북선을 만든 힘은 이순신의 관찰력이 그 시작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 1592년 2월 4일. 맑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한 뒤, 북봉(北峰)의 연대(煙臺, 봉수대) 쌓는 곳에 올라갔다. 쌓는 자리가 아주 좋았다. 허물어질 까닭이 전혀 없었다. 이봉수가 부지런히 일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내내 자세히 살펴보며 바라보았다. 저녁이 되어 내려왔다. 해자 구덩이를 돌아보았다.

이순신이 이봉수로 하여금 여수 종고산(220m) 정상에 봉수대를 쌓게 했고, 이순신이 직접 그곳에 올라가 자세히 관찰하고 있는 모습이 기록된 일기다. 이날처럼 관찰하는 이순신의 모습이 《난중일기》에 자주 등장한다.

▲ 1592년 2월 22일. 포(砲) 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 1592년 2월 27일. 북봉(北峯, 방답진 봉수)에 올라갔다.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고 둘러보았다. 고립되고 위험하게 단절된 섬이다. 모든 방향에서 침입을 당할 수 있다.

이는 사물이나 상황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는, 혹은 대충 보는 자세가 아니다. 1593년 8월에 쓴 <화포를 봉해 진상하는 장계(封進火砲狀)>는 이순신이 어떻게 관찰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 여러 차례  큰 전투를 하면서 일본인의 조총을 많이 얻었다. 늘 눈앞에 놓고 그 절묘한 이치를 실험했다. 총신이 길기에 총구멍이 깊고, 그 때문에 총탄 나가는 힘이 맹렬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 승자총통과 쌍혈총통은 총신이 짧기에 총구멍도 얕아 총탄 나가는 힘이 일본의 조총과 같지 않고, 소리도 웅장하지 않다.

이순신은 신무기인 조총을 자세히 관찰하고, 우리나라 개인화기인 승자총통과 비교하며 장단점을 파악해 조선식 조총을 새로 만들 수 있었다.  1593년 9월 15일 일기 이후의 메모, “정철총통(正鐵銃筒, 조총)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그 제조와 조작의 미묘한 이치를 알지 못했다. 이제야 온갖 생각 끝에 조총을 만들었다. 왜의 조총과 비교해도 아주 절묘하다. 명나라 사람들이 진영에 도착해 시험사격을 했다. 잘 만들었다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즉 이미 그 미묘한 이치를 얻었기 때문이다.”는 이순신의 지속적인 철저한 관찰의 결과로 탄생한 이순신의 조총 개발 모습이다.

이순신은 자신이 만든 조총이 일본군의 조총보다 월등하다고 자부한 것도, 관찰을 통한 혁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혁신의 시작은 결국 이순신처럼 자신의 관련 분야 혹은 사업에 대한 치열한 관찰이 그 첫걸음이다. 높은 하늘에서 먹잇감을 발견하려는 독수리의 눈, 승리를 열망했던 이순신의 눈으로 관찰한다면, 추구하는 혁신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관찰을 하든 혁신을 하든 삶에는 아주 중요한 태도가 있다. 2월 4일의 봉수대 쌓는 일을 한 이봉수에 대한 이순신의 평가, “부지런히 일한 것을 알 수 있었다.”는 말에는 이순신이 삶을 대하는 태도,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 나타난다. 2월 22일 일기도 마찬가지다. 녹도를 순시한 뒤 “녹도 만호 정운이 온 정성을 다한(盡心, 진심) 모습이 모든 곳에 있었다.”라고 했다. 이순신은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았고, 자신도 그렇게 살았다. 또 사람들의 능력을 중요시했지만, 능력만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성실성과 책임감, 열정을 더욱 더 높이 평가했다. 리더 이순신 자신이 성실했고, 무한 책임감을 실천했으며, 자신의 일에 온몸을 불사르는 열정이 있었기에 그는 언제나 승리할 수 있었다.

경계의 힘, 승리의 첫 단추

2월 4일 일기에 나오는 봉수대는 국경에서 발생하는 적의 침입 상황을 서울과 각 중요 기지에 전달하기 위한 군사 목적의 통신 수단의 하나였다. 봉수대 사이의 거리는 40∼50리(10km)로 신호를 보내기 좋은 장소, 즉 조망이 뛰어난 산 정상에 설치했다. 밤에는 횃불(烽, 봉), 낮에는 연기(燧, 수)를 이용했기에 봉수라고 불렀다. 봉수는 경봉수·연변봉수·내지봉수·권설봉수로 나뉜다.

경봉수는 임금이 살고 있는 서울의 중앙봉수로 전국의 모든 봉수가 이곳에 집결되었다. 서울 남산과 무악산에 설치된 봉수대가 경봉수이다. 남산은 함경도·평안도·강원도에서 발생한 상황을, 무악산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 발생한 상황을 접수했다. 연변봉수는 국경선이나 해안가 최전방에 설치된 것으로 적의 침입을 가장 먼저 확인해 전달하는 봉수다. 내지봉수는 내륙에 설치된 것으로 국경에 설치된 연변봉수와 서울의 경봉수를 연결하는 중간 봉수다.

연변봉수의 신호가 서울까지 도착하는 시간은 12시간이었다. 기상 상태로 인해 횃불이나 연기로 신호를 전달할 수 없을 경우에는 봉수대를 지키는 봉수군이 인접한 봉수대까지 직접 달려가 정보를 전달했다. 횃불을 이용할 때의 신호는 조선 초기에 두 개의 신호였다가 세종 때 5개로 세분화 되었다. 아무런 일이 없는 평시에는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선에 접근했을 때는 3개, 국경을 침범했을 때는 4개, 적과 아군이 접전할 때는 5개의 횃불로 표시했다. 봉수대는 고종 31년(1894년)에 폐지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실시간으로 정보가 전달되는 오늘날과는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지만, 조선시대 봉수 시스템은 나라를 지키는 최전방에서 크게 활약했다. 임진왜란 발발시의 기록에도 봉수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후 조정에 보낸 보고서를 살펴보면, 응봉 봉수대(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두송산, 233m)에서 4월 13일 신시(申時, 15시~17시)에 부산포로 이동 중인 왜선을 발견해 보고하고 있다. 또한 14일 묘시(卯時, 05시~07시)에 황령산(현재 부산시 남구 대연동 황령산, 427m)의 봉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하는 일본군에 대한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전투에 패배한 장수는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장수는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임진왜란 초기 최소한 국경의 봉수군들 만큼은 경계에 실패하지 않았다. 천민이나 다름없던 봉수군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나라의 안위를 위해 바다를 지켜보며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2월 4일의 일기는 ‘난 사람, 이순신’이 아니라, ‘된 사람, 이순신’의 모습이다. ‘난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에 ‘된 사람’이 그립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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