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충-흥수-계백’… 백제 3충신이 신라 압도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성충(成忠,?〜656)은 백제 말기의 충신으로 일명 ‘정충(淨忠)’이라고도 한다. 656년(의자왕16) 좌평(佐平, 1품)으로 있을 때 자만과 주색(酒色)에 빠진 의자왕(義慈王)에 극간(極諫)하다가 투옥되어 죽은 비운의 주인공이다.

성충은 흥수(興首), 계백(階伯)과 함께 ‘백제의 3충신’으로 불린다. 부여 부소산성 남문터 밑의 ‘삼충사(三忠祠)’는 이들 3충신을 모신 사당이다. 사당 좌측으로부터 성충-흥수-계백의 순서대로 모셔져 있다. 성충과 흥수는 백제 최고 관직인 좌평(佐平)을 지냈으며, 계백장군은 2등 관직인 달솔(達率)에 이르렀다.

성충은 의자왕과 같은 부여(扶餘)씨로 백제 왕족 출신이다. 논리가 명확하며 언변이 뛰어나고 병법에 밝아 가히 하늘이 낳은 재사라 할만 했다. 동생 윤충(允忠)은 ‘대야성전투’에서 전공(戰功)을 세운 백제의 대표적인 무장이다.

백제의 제31대 국왕이며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 재위:641~660)은 즉위 이후 유교정치 이념을 신봉하였고, 왕태자 시절부터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남달라 ‘해동증자(海東曾子, 중국의 증자처럼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다고 붙인 이름)’라고 칭송을 받았다.

김유신과 의자왕이 쟁패를 겨루던 당시의 삼국 정세는 신라가 최 약세였다. 642년 8월의 ‘대야성(大耶城, 합천) 전투’는 삼국통일전쟁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이 싸움에서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성주인 사위 품석이 피살됐고, 옛 가야 땅 40여성이 백제에 귀속했다.

신라를 압도하게 된 백제의 의자왕은 3충신인 ‘성충-흥수-계백’을 얻고도 스스로 자만에 빠졌다. 위기에 몰린 신라는 자구책으로 당나라와의 군사동맹을 맺게 되었다.

투옥된 충신 성충은 “살아서 내 두 눈으로 백제가 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며 단식을 하다가 백제가 멸망하기 4년 전인 656년 3월에 옥중(獄中)에서 비장한 상서(上書)를 올린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충신은 죽어서도 임금을 잊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신이 감히 한 말씀 올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형세의 변화를 살펴보았는데,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반드시 지세(地勢)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니, 상류(上流)에 있으며 적을 맞은 연후에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병이 만약 오거든 육로(陸路)로는 탄현(炭峴, 옥천)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로(水路)로는 기벌포(伎伐浦, 백강, 금강하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 그 험준하고 좁은 곳에 의지하여 방어하여야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28, 의자왕 16년 3월)

드디어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당나라군이 기벌포를 지나 사비성으로 쳐들어오고,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에게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패전했다(7월 9일)는 전황(戰況)을 보고받은 의자왕은 “후회로다. 내가 성충의 충성된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라고 탄식하였다.

의자왕은 660년 7월 18일 항복을 했다. 그리고 8월 2일 사비성에서 패전의 책임을 지고 당나라군과 신라군에게 사죄하며 술을 따라 올리는 ‘행주(行酒)의 예’를 행했다.

백제 멸망 직전까지 내정은 상당히 안정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위 초 해동증자라는 칭송까지 들었던 의자왕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구당서≫ ≪자치통감≫에는 멸망 당시 백제 호구 수가 76만 호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고, ≪대당평백제국비명≫에는 백제 인구가 620만 명에 이르렀다고 썼다.

그러나 왕성을 지키는 계백 장군의 결사대가 겨우 5000명이었다는 사실은 의자왕 체제가 나당 연합군의 본격적 공격 이전에 이미 내부에서부터 붕괴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처럼 백제의 멸망은 의자왕 20년 재위 기간 중 15년째부터 나타난 난정(亂政)으로 인해 왕권강화에 대한 귀족집단의 반발이라는 ‘내부 분열’로 촉진된 권력체제의 붕괴가 직접적인 원인이라 하겠다.

여기서 “시작이 없는 경우는 없지만, 끝까지 마무리 짓는 경우는 드물다(靡不有初 鮮克有終)”는 ≪시경(詩經)≫의 가르침을 음미해 보자. ‘초심’을 지키고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현인들의 가르침이다.

조선의 성종은 침실 벽에 ‘미불유초(靡不有初) 선극유종(鮮克有終)’이라는 경구를 써놓고 마음속으로 항상 새겼다고 한다. 초심을 유지하면 절대 일을 망치지 않는다(初心不亡). 그러나 부귀한 자가 되어 교만하면 자신에게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게 된다(부귀이교富貴而驕 자유기구自遺其咎).

의자왕은 한 때의 성공에 안주해 자만에 빠졌다. 위기를 부정하고 미래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했다. 고구려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당과의 외교관계를 소홀히 한 근시안적인 리더십과 편향된 국제 감각을 유지했다. 성충과 흥수로 대표되는 충신들의 ‘당나라 침공설’과 ‘전쟁 대비’의 주장을 궁지에 몰린 귀족들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술수로 판단했다.

지도자 한 사람이 때로는 나라를 안정시킬 수도 있다(一人定國).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말처럼 선입견과 자기 목표에 대한 집착이 의자왕으로 하여금 정보분석의 오류를 범하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의자왕 자신은 망국(亡國)의 군주로 전락하고 700년 왕업을 목적(牧笛, 목동이 부는 피리)에 부쳤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의자왕의 실패’에서 지도자의 리더십이 갖는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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