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중한 무예로 기병대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배현경(裵玄慶, ?~936)은 고려 개국공신 네 사람 중 하나다.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게 하였다.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많이 세워 1등 공신으로 錄勳(녹훈, 훈공을 문서에 기록함)되었다.

초명은 백옥삼(白玉衫, 白玉三)이며, 경주에서 태어났다. 고려 개국 원년에 태조로부터 배씨로 사성(賜姓) 받았으며, 현경으로 사명(賜名) 받았다. 경주 배씨의 시조이다.

배현경은 담력이 남달리 뛰어나고 무예가 출중하여 전장(戰場)에서 많은 공을 세운 덕분에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 일개 병졸에서 마군장군(馬軍將軍, 기병대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독단과 전횡을 일삼는 궁예의 공포정치가 지속되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급기야 곳곳에서 반란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됐다. 이에 배현경은 홍유(洪儒)·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왕건(王建, 재위기간:918~943)에게 다음과 같이 거사를 권하여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우게 하였다.

“삼한이 분열된 이후 도적의 무리가 다투어 봉기하자, 지금의 왕(궁예)이 용맹을 떨쳐 크게 호령하여 마침내 초적(草寇)을 평정하고 세 지역으로 나누어진 나라 땅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습니다.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한 지도 스물네 해 남짓 지났으나, 지금 주상이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죽이고 신료를 죽여 씨를 말리고 있습니다. 백성은 도탄에 빠져 그를 원수같이 미워하니,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은나라의 주왕(紂王)의 악정(惡政)도 이보다 더하지 않았습니다. 예로부터 암주(暗主)를 폐하고 명왕(明王)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입니다. 청컨대 시중께서는 은나라 탕왕(湯王)과 주나라 무왕(武王)의 옛 일을 실행하소서.”

고려 개국 1등 공신들은 정변을 주도한 세력으로 모두 마군 출신들이었다. 출신지역을 보면 배현경은 경주, 홍유는 의성, 신숭겸은 곡성, 복지겸은 면천 출신이다. 의성과 경주는 신라 지역이며, 곡성과 면천은 후백제 지역에 속한다. 곧 이들의 출신지는 ‘비(非)후고구려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건국 후 배현경은 태조 왕건에게 천도(遷都)를 건의했다.
“철원은 궁예의 터전입니다. 철원 도성 백성들의 주상에 대한 반감은 왕권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왕권 안정과 민심 수습을 위해 천도가 필요합니다.”

왕건은 배현경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배현경을 새 도읍을 건설하는 총 책임자인 개주도찰사에 임명했고, 이듬해 919년(태조2) 1월에 도읍지를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다. 이후 배현경은 궁예의 잔당을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워 대상행이조상서 겸 순군부령도총 병마대장에 이르렀다. 이후에 승진하여 최고의 등위인 정1품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왕건은 진압정책과 회유정책을 병행했다. 호족들의 군사적 반발에는 진압정책을, 나머지 경우에는 회유정책을 택했다. 이런 회유정책의 하나가 각지의 호족들에게 후한 폐백을 주며 자신을 낮추는 ‘중폐비사(重幣卑辭)’ 정책이었다.

즉위년(918) 8월 왕건은 “짐은 각처의 도적들이 짐이 처음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혹 변방에서 변란을 일으킬 것이 염려된다”면서 “각지에 단사(單使)를 파견해 후한 폐백을 주며 말을 낮추어서(重幣卑辭) 혜화(惠和)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고려사》 태조 원년 8월)”고 말했다.

배현경은 강직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고려 개국 이후 통일 작업이 지속되면서 그는 때론 장수로서, 때로는 중앙의 감찰 관리로서 활동하다가 홍유와 마찬가지로 고려가 통일을 이루던 그해(936년) 세상을 뜨고 말았다.

태조 19년(936)에 배현경이 병이 깊어 위독하자, 태조가 그의 집으로 가서 손을 잡고, “아아! 천명이로구나! 그대의 자손이 있으니 내가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태조가 문을 나서자 곧 배현경이 운명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어가(御駕)를 멈추고 관비(官費)로 장사를 치를 것을 명한 후에 환궁하였다.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사전적인 의미는 ‘총명하고 사리에 밝아서 일을 잘 처리하여 일신을 잘 보전함’을 말한다. 이 말은 ‘자신의 안전만을 도모하는 행위’ 또는 ‘권력의 눈치를 보며 자기 몸을 지킨다’는 뜻으로 변질되어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세태를 개탄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명철보신의 처세 철학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대신(大臣)은 ‘명철보신’해야 한다고 했으니, 이는 임금을 보필하는 고관대작은 사람을 천거하여 임금을 섬기게 해야 하기 때문에 선악(善惡)을 밝게 구별하여 어진 선비들이 출사(出仕)할 수 있게 해주고, 시비(是非)를 밝게 분별하여 뛰어난 사람을 발탁하게 해야 한다.”

다산(茶山)의 이 말은 고위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국가(임금)가 잘 보존되도록 하는 것이 ‘명철보신’의 참다운 의미라는 것이다. 자신의 지위 유지를 위하여 선악도 시비도 가리지 않고, 불리할 때는 침묵해버리는 보신주의적인 처세는 고관대작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공을 이루고도 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저 머무르지 않기에, 이로써 공도 떠나지 않는다(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라는 말을 했다.

고려의 개국공신들은 모두가 노자의 ‘공수신퇴 천지도야(功遂身退 天地道也)’,‘공을 세웠더라도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하늘의 도다’라는 명철보신의 철학으로 일관했다. 그들은 끝없는 권력을 추구하기보다는 ‘지족안분(知足安分)’하는 공직자의 삶을 영위해서 후세의 우러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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