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2년 2월 10일엔 안개비가 내렸다”
- 明, 조선과 일본 관계 의심… 국제정세 급변

<구름에 덮인 한산도와 추봉도>
1592년 2월 8일의 일기에서 거북선이 처음 등장했다. 또 그 이전 일기에서는 전쟁에 대비하는 다양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해양방어시설인 철쇄였다. 철쇄를 바다에 설치하기 위해 돌을 자르고, 날라야 했다.

▲ 1592년 2월 9일. 맑았다. 새벽에 쇠사슬을 꿰는 긴 나무를 벨 일로, 이원룡에게 군사를 이끌고 두산도(斗山島, 돌산도)로 가게 했다.

철쇄를 설치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철쇄를 설치하기 위해 철쇄, 돌, 나무 등이 필요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기다.

대명 외교 전문가 집안 출신 이순신

▲ 1592년 2월 10일. 안개비가 내렸다. 맑았다 흐렸다 했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김인문이 순찰사영에서 돌아왔다. 순찰사(이광)의 편지를 읽어보았다. “통사(통역관) 등이 뇌물을 많이 받았고, 중국 조정(中朝)에 허위 사실을 알리며 군사를 요청함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었다. 중원(中原, 명나라)이 우리나라와 일본(日本) 사이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의심하게 했다. 그 흉악하고 패악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통사 등은 이미 붙잡아 가두었다”고 했다. 괴상야릇해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2월 10일 일기는 임진왜란 직전의 긴박한 국제정세를 보여준다. 이는 임진왜란이 어느 날 갑자기 일본이 침략해 일어난 전쟁이 아니라, 예정돼 있었고, 그것을 조선과 명나라 모두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일기에 등장하는 통사(通事)는 사역원에 소속된 통역관이다. 이순신의 5대조 할아버지 이변(李邊, 1391~1473)도 최고의 통역관이었다. 일반적인 통사가 중인층이었다면, 이변은 사대부로 중국어에 능통해 대명 외교 전문가로 활약한 경우다.

이변의 탁월한 능력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에도 언급된다. 세종 11년 9월 6일, 예조판서 신상이 대명외교와 관련해 통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변이 문과에 급제를 한 사람이지만, 어학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고, 실력이 뛰어나 사역원의 학생들이 그에게 배우고자 한다면서, 이변을 훈도(訓導, 오늘날의 개념으로 본다면 대학교수)로 삼자고 건의하고 있다. 세종도 그에 동의하며, “통역학은 실로 국가의 중대한 일이다. 이변은 나의 뜻에 따라 부지런히 배워 게을리하지 않았다”라고 이변의 실력과 학습태도를 칭찬했다.

이변은 또한 《세종실록》의 다른 기록에서도 “이변은 성품이 둔했으나, 30세가 넘어 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밤 새워 읽고 공부했고, 중국어를 잘 하는 사람들을 스스로 적극 찾아가 배웠고, 집안 사람들과도 중국어로 대화를 했고, 친구들과도 중국어로 말한 뒤에 우리나라 말을 할 정도였다. 그런 과정을 통해 중국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이변은 성종 때까지 대명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성종실록》에 기록된 <영중추부사 이변의 졸기>(성종 4년 10월 10일)에는 이변은 세종 원년인 1419년에 문과에 합격했고, 한문과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다. 외교관련 부문은 물론이고 형조판서, 예문관 대제학, 공조 판서, 지중추원사, 판중추원사, 영중추부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83세에 사망할 때까지 이변은 세종부터 성종까지 6명의 임금을 모시며 50여년을 고위관료, 외교전문가로 명나라에도 무려 30~40차례 다녀왔다. 이변은 중국어 교재인 《훈세평화(訓世評話)》도 편찬했다.

그의 성격에 대한 평을 보면 이순신과도 닮은 모습이다. “성품이 엄하고 곧았다. 상관의 명이라도 옳지 않은 일에는 구차하게 따르지 않았다. 또한 잘못을 저지른 아랫사람에 대해서도 꾸짖기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변의 기록을 보면, 이순신 집안은 중국어 학습열이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최초 전기인 《이충무공행록》을 저술한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도 중국어 실력을 갖춰 이순신 막하에서 명나라 군대 접대를 담당했다. 이순신은 5대조 할아버지 이변을 통해 직간접으로 명나라를 접할 수 있었고, 훗날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을 당당히 대할 수 있는 힘이 된 듯하다.

7년 전쟁 먹구름의 시작 

2월 10일 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조선의 통역관들이 일본의 침략을 명나라에 알려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명나라가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의심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는 임진왜란이 4월 13일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었고, 일본의 침략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고 있는 것을 조선과 명나라 모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1591년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 이순신의 일기에 기록된 각종 전쟁 준비 상황도 바로 예상된 전쟁에 대한 대비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순신처럼 임진왜란 당시에 일기를 썼던 의병장 김종(金琮, 1533~1593)의 일기에도 이순신의 2월 10일 일기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선전관이 통역관 신응성·이경신의 집에서 5자 크기의 농을 찾아 대궐에 들였고, 그의 처자식을 잡아 가두었다(1592년 1월 22일).” “통역관 유정량·이경신의 처자를 대궐 마당에서 심문했다. 동지사(冬至使, 동지에 중국에 보내던 사신)와 통역관을 잡아오기 위해 이순경·이통이 몰래 나갔다 돌아왔다(1592년 1월 23일).”

김종의 일기에는 명나라에 다녀온 통역관을 붙잡아 취조하는 모습이 있다. 당시 명나라 내부에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의심하는 명나라 기록도 있다. 이다.

“1592년 2월 19일 명나라 병부(兵部)는 ‘왜놈들이 여러 나라를 속이고 위협해 중국을 침략하려고 계획했는데, 조선이 그 정보를 알려주었어도 명나라에서는 조선을 길잡이로 의심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이 통분해하고 있었다”(《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 1592년 2월 19일).

이순신의 2월 10일 일기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국제정세를 보여준다. 이순신은 다가오는 죽음의 시대를 예감하며, 객관적 사실에 눈을 감지 않았다. 알면서 외면한 것이 아니라, 알기에 더욱 더 철저히 자신만의 역사를 준비해간다. 위기가 꼭 닥쳐야 아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징조를 무시하지 않을 때, 위기는 새로운 기회가 된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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