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 전총리는 자타가 인정하는 ‘행정의 달인’이다. 그는 75년 전남도지사를 시작으로 교통부 장관, 농수산부 장관, 내무부 장관, 관선 서울시장, 김영삼 정부 시절 국무총리, 다시 민선 서울시장과 참여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이어 탄핵 기간 중에 대통령 권한 대행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 그야말로 행정의 달인 중의 달인이다. 그처럼 화려한 경력을 가진 행정가가 나오기는 앞으로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각종 요직을 맡아온 비결에 대해 고 전총리의 한 측근은 “물론 실력과 능력이다. 고 전총리는 어떤 일과 직책을 맡아도 소리 소문 없이 무난하게 처리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장수 비결이 있는데, 그는 절대로 임명자의 의중을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 고 전총리는 늘 임명자의 그늘에서 조용히 ‘소금’의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일부에서는 이런 고 전총리의 행태를 비판하며 ‘보수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반면에 ‘안정적’이라는 평가도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다닌다.노 대통령도 고 전총리의 이런 안정적인 측면을 높이 사서 당선자 시절에 총리의 자격 요건으로 “총리는 몽돌(모가 나지 않고 둥근 돌)을 잘 받쳐줄 수 있는 나무받침대 같아야 서로 짝이 잘 맞지 않겠느냐”고 말해, 오랜 행정경험을 가진 노련한 고 전총리를 추켜세우기도 했다. 이런 성향의 고 전총리가 예상과 달리 노 대통령의 거듭된 장관 제청 요구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냥 물러났다. 이에 대해 온갖 구설수가 일자 고 전총리는 “마치 내가 제청권 행사를 고사하기 위해 배수진으로 사표를 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부드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고 전총리의 해명과 달리 주위에서는 다르게 평가한다. 이수성전총리는 이에 대해 “많은 법학자들이 얘기하는 물리적인 법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였다”고 설명했다. 대통령과 총리 사이의 관계에서 “신뢰가 첫째이며, 신뢰가 무너지면 총리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탄핵 기간 중에 ‘고난 대행’이라는 별명을 들어가며 열심히 대통령 권한 대행 직을 수행했던 고 전총리의 사임 의지에 단 한 번도 반대 의지를 표명한 적이 없고, 이번 장관 임명에 있어서도 고 전총리와 상의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고 전총리의 자존심이 극도로 상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에 좀 더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고 전총리가 사표를 제출하기 앞서 ‘각료 제청권 행사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각계 의견을 담은 문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는 기사가 모 언론에 난 것이다.

이를 두고 고 전총리가 모종의 의도를 품고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총리실 주변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고 전총리가 ‘유연함’으로 대표되는 이미지에 ‘소신과 강직’이라는 면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고 전총리가 민선 서울시장과 대통령 권한 대행까지 했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용꿈’을 고려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고 전총리가 과거 김영삼 대통령 시절 이회창 전국무총리를 벤치마킹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영삼 정부 시절 감사원장을 역임했던 이회창씨는 ‘대쪽‘ 이미지를 발판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과거 국무총리와는 달리 김영삼 전대통령의 독주에 제동을 걸려고 했다.

총리인 자신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것이 괘씸죄에 해당되어 바로 해임됐다. 바로 그 순간부터 이회창씨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대쪽 이미지를 발판으로 이회창씨는 대통령 후보까지 올랐다. 고 전총리가 노린 것도 바로 이런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실제 한나라당의 한 전략가는 “고 전총리가 좋은 승부수를 던졌다. 지금 노 대통령은 또 다시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있고, 따라서 반대자는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고 전총리는 이 반대자에게 어필하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 정치가 정책과 리더십보다는 ‘이미지’에 의해 좌우되기에 고 전총리는 결코 손해보는 장사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고 전총리의 용꿈은 실현가능성이 있는가.정치권 내부에서는 “아직은 힘들다”고 진단한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는 정동영, 김근태 의원이 막강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고, 한나라당에서는 박근혜 대표와 이명박 서울시장이 또한 막강하다.

이런 틈새를 뚫고 고 전총리가 대권 가도에 진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다른 관계자는 색다른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정동영, 김근태, 박근혜 등은 아직 국가 경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후보이다. 그들 역시 대통령감이라는 ‘이미지’는 있지만 실제 그들이 대통령이 되어 이 복잡다단한 나라를 잘 꾸려나갈지는 미지수이다. 반면 고 전총리는 대통령 권한 대행까지 무난하게 소화해낸 경력의 소유자이기에 그가 앞으로 이미지 관리만 잘 하면 오히려 대권 가도에 복병이 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이런 세간의 평가와는 아랑곳없이 고 전총리는 지금 서울 연지동 여전도회관에 있는 개인 사무실에서 칩거하고 있다. 그는 이곳 4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책도 읽고 사람들도 만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용꿈 대망이 어떤 식으로 표출되고 발전할지 또 하나의 차기 대권 후보 감상법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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