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 마시고 춤추되 덕과 예 지키면 만수무강
- 임금 재위 기간 최초로 춤 춘 사람은 정종

<태조 이성계 어진 보물931호, 전주시 경기전>
지난 호에서 1592년 2월 12일 일기를 해설했었다. 그날 일기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일기를 다시 보자.

▲ 1592년 2월 12일(양력 3월 25일). 맑았고, 바람도 고요했다. 식사를 한 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해운대로 옮겨 앉았다. 훈련용 화살을 쏘았다. 사냥한 꿩을 물에 가라앉히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주 조용했다. 군관 무리들은 또한 모두 일어나 춤을 추웠다. 조이립은 시를 읊었다. 석양을 타고 돌아왔다.

자연 아름다움 노래하는 시인

전쟁 준비에 여념 없던 봄날, 잠시 시간을 내어 이순신과 그의 부하 장수들이 작은 잔치를 벌였다. 장수들은 춤을 추고, 시를 노래했다. 이순신도 그날 잔치가 끝난 뒤에, “석양을 타고(乘夕) 돌아왔다”고 그날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순신은 당시에 흔한 이동수단이었던 말도, 또 수군으로서 당연한 이동수단인 배 혹은 전선(戰船)을 타지도 않았다. 석양을 탔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저녁 무렵에 대한 표현은 아주 다양하다. 대표적인 것은 석(夕), 모(暮), 혼(昏)이다. 석(夕)은 '저녁', 모(暮)는 '해가 질 무렵', 혼(昏)은 '어두울 무렵'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날처럼 석양을 탔다는 경우와 같은 표현도 있다.

▲ 1596년 4월 13일. 지는 해를 탔다(乘暮, 승모).
▲ 1597년 11월 2일. 어둠을 탔다(乘昏, 승혼).
▲ 1598년 9월 18일. 달을 탔다(乘月, 승월).

그냥 저녁 혹은 밤과는 느낌이 전혀 다른 사고방식이다. 칼과 활을 들고 전쟁터를 전전한 장수가 아닌 붓을 들고 한가로이 자연을 감상하는 문인, 시인의 모습이 떠오르는 표현들이다. 또 조이립이 시를 읊었다는 것도 원문은 “吟絶句(음절구)”이다. 즉, 네 구(句)로 이루어지는 한시(漢詩)를 읊었다. 한 구(句)가 다섯 글자면 오언절구(五言絶句), 일곱 글자면 칠언절구(七言絶句)라고 한다. 조이립이 읊던 시를 들었던, 이순신은 그 느낌을 살려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시심을 일으켜 석양을 타고 돌아온 것이다.

이날 장수들도 모두 평화롭게 봄볕을 즐겼다. 게다가 춤까지 추고 있다. 옛적부터 우리 민족을 음주가무의 민족이라고 했는데, 이 날 일기를 보아도 그런 문화가 드러난다. 또 지금 전국방방곡곡에 넘치는 노래방을 보아도 우리의 유전자에는 특별히 음주가무 DNA가 새겨져 있는 듯하다.

가면을 쓰고 춤추는 왕

 조선시대의 왕들은 어땠을까. 극히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근엄하고, 혹은 큰 소리를 치거나, 고뇌하는 모습의 왕들이 나온다. 그러나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왕들도 풍류를 즐기는 평범한 한 인간이었고, 신하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실록에 기록된 조선 임금 중 재위 기간에 최초로 춤을 춘 사람은 정종(定宗, 1357~1419)이다. 정종은 상왕이었던 태조 이성계와 함께 춤을 추거나, 세자 이방원(훗날 태종)과 춤을 추기도 했다.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된 태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춤추기를 가장 좋아했던 왕이다. 재위(1400~1418) 시기는 물론이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상왕인 상태에서도 춤을 즐겼다.

재위했던 19년 동안 그가 직접 춤을 춘 사례는 실록 기록에 따르면 14번이다. 아버지인 태상왕 이성계가 춤을 추자 그와 함께 추었고, 상왕인 형 정종과 함께 추기도 했다. 그는 주로 윗사람인 아버지와 형, 장인 앞에서 추었다. 그러나 신하들 앞에서는 신하들에게 춤을 추게 하고 구경했다.

세종도 춤을 추었는데, 대부분 아버지 태종과 함께한 잔치 자리에서 추었다. 그는 아버지 태종과 달리 신하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세조는 태종처럼 신하들의 춤을 즐겨 구경했다. 그는 과거합격자에게 춤을 추게 했고, 기생과도 춤을 추게 했다. 성종은 1476년, 인정전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참석한 늙은 백성들과 함께 춤을 추었다.

폭군이며, 난봉꾼의 대명사로 이야기되는 연산군은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55건의 춤 기록이 나올 정도로 즐겼다. 집권 후기에는 연일 궁궐 나인들을 뒤뜰에 모아놓고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고, 난잡하게 춤을 추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처용무를 좋아해 대비 앞에서 처용 가면을 쓰고 춤을 추기도 했다.

왕을 백허그 하고 춤추는 신하

 왕이 춤을 출 때 신하들은 어떠했을까. 물으나마나 당연히 춤을 추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업한 정도전은 태조가 춤을 추라고 하자 웃옷을 벗고 춤을 추었다. 세종 때, 어느 잔칫날에는 남재(南在, 1351~1419)가 춤을 추다가 함께 춤을 추던 세종의 허리를 껴안고 춤을 추기도 했다. 왕 앞에서 재롱과 다름없는 춤을 춘 신하도 있었다. 신하가 왕을 껴안고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열린 문화였다.  권위주의로 강압하거나,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권위를 가진 왕과 권위를 존중하는 신하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열린 나라에서 닫힌 나라, 권위주의가 강화되면서 왕은 춤을 추지 않았고, 신하들도 춤을 추지 않기 시작했다. 성종 때부터는 왕이 명령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춤을 추면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중종 이후부터는 왕도 춤을 추지 않았다. 때문에 중종 이후 왕 앞에서 신하가 춤을 춘 사례는 극히 드물다.

《난중일기》의 기록처럼 조선 중기까지 왕, 선비 혹은 장수가 춤을 추는 것은 자연스런 일상이었다. 장소도 무관했다. 잔치자리에서 뿐만 아니라, 김대유(金大有, 1479~1552)처럼 서당에서 홀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했다. 춤 종류도 다양했던 듯하다. 한성부윤 어효첨(1405~1475)은 한쪽 어깨를 높이 들고 추는 ‘희무(戱舞)’라는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었다. 오희문 1596년 11월 1일 일기에 나오는 학처럼 훨훨 나는 듯한 학춤(鶴), 박취문의 1646년 1월 21일 일기에 나오는 쌍대무(雙對舞) 등이 있다.

그러나 술과 춤에는 언제나 예절이 동반되었다. 고산 윤선도는 “술도 머그려니와 덕(德)업스면 난(亂) 하나니, 춤도 추려니와 예(禮) 업스면 잡(雜) 되나니 아마도 덕례(德禮)를 딕희면 만수무강(萬壽無疆)하리라” 즉 “술도 먹어야 하지만, 덕이 없으면 어지럽게 된다. 춤도 춰야 하지만 예의가 없으면 잡스럽게 된다. 술을 마시고 춤을 추되 덕과 예를 지키면 만수무강할 것이다”고 원칙을 노래했다. 즐기되 방종하지 않는 놀이문화가 조선 선비의 음주가무 문화였다.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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