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덤 까지도 잊혀진 비극의 영웅
- 남해바다 용이 된 시신, 가묘 행방 묘연

<시인 박인환 묘비(서울 망우리 공원)>
▲ 1592년 2월 13일. 맑았다. 우수사(右水使)의 군관이 왔다. 화살용 대나무 큰 것과 중간 것 100개, 쇠 50근(斤, 30kg)을 주어 보냈다.

이날 일기에는 처음으로 ‘수사(水使)’란 명칭이 등장한다. 수사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약칭이다. 정3품 무관으로 임기는 720일이다. 각 도(道)의 바닷가에 위치한 진(鎭)·포(浦)·보(堡)에 소속된 전선(戰船)과 그 각각의 책임자였던 첨절제사(종3품, 약칭 첨사)·우후(정4품)·동첨절제사(종4품, 약침 첨사)·만호(종4품)·권관(종9품) 등을 지휘·통솔했다.

경상·전라·함경도에 각 3인, 경기·충청·평안도에 각 2인, 황해·강원도에 각 1인이 배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상·전라도에 각 2인, 경기·충청도에 각 1인씩 모두 6인이 임명되었고, 나머지 1명씩은 해당 도의 관찰사나 병마절도사가 겸임했다. 때문에 수군을 현장에서 직접 지휘하는 수사는 전라도의 경우, 전라우수사(이억기)와 전라좌수사(이순신), 경상도는 경상우수사(원균)와 경상좌수사(박홍)가 있었다.

반복되는 잘못의 답습

《난중일기》에서 ‘수사’ 혹은 ‘우수사’로 기록해 누구인지 정확히 특정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기존 번역본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수사(○○○)’라고 특정인물을 명기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인물을 실제로 당시 상황과 일기의 전후 맥락, 기타 여러 사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등으로 확인해 보면, 다른 인물인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러 번역본에서는  《난중일기》 원문에도 없는 잘못된 오류를 지속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 발견된다. 검증을 하지 않고, 기존의 번역문을 그대로 인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한 사례를 들면, 1592년 4월 15일 일기의 번역 사례가 그런 경우이다.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을 상륙한 이후, 이순신은 그와 관련된 여러 정보를 경상도의 여러 지휘관들에게 받는다. 다음은 관련 부분이다.

▲ 1592년 4월 15일. 해 질 무렵에 온, 영남우수사의 전통(傳通)안에, “왜선 90여 척이 들어와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고 했다. 같은 시간에, 수사의 공문이 또 왔다. “왜적선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래서 즉시 긴급 장계를 써 보냈다. 더불어 순찰사와 병사(兵使), 우수사에게도 보냈다.

이 일기에는 영남우수사와 수사, 우수사가 각각 등장한다. ‘수사’가 어느 지역의 어떤 수사인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우수사도 경상도인지 전라도인지 불분명하다. 그런데 현재의 거의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는 ‘수사’를 경상(영남)좌수사 박홍으로 특정하고 있다. 유일한 예외이다시피 한 것이 홍기문의 번역본이다.

홍기문은 ‘수사’를 영남우수사 원균으로 보았다. ‘수사’가 박홍인지 원균인지를 이순신이 바로 그날 술시(戌時, 19시~21시)에 쓴 장계와 대조해 보면, 홍기문의 번역처럼 ‘수사’는 앞에 언급했던 영남우수사 원균이 맞다. 이순신은 장계에서 영남우수사 원균에게 연이어 공문을 받았다고 했고, 또 그 장계에는 영남좌수사 박홍은 나오지 않는다. 우수사는 일기의 맥락과 상황을 보면,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1561~1597)이다.

여진족과 일본군을 격퇴한 맹장

2월 13일 일기 속의 우수사는 4월 15일 일기의 사례와 이순신과의 직간접적인 관계를 고려해 추측해 보면, 전라우수사 이억기로 볼 수 있다. 이순신과 함께 전라도 좌우지역의 해양방어를 책임진 인물이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제주를 포함해 서울에서 남쪽 방향으로 볼 때 전라도 우측지역을 관할했다. 그의 본영은 전라남도 해남에 있었다.

이순신과 이억기의 인연은 오래되었다. 이순신이 함경도 조산보만호였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 직전에 전라좌수사와 우수사로 만났고, 서로 협력하며 불패의 조선 수군 역사를 썼다. 이억기는 조선 왕족의 후예로 어릴 때부터 탁월한 무예실력을 높이 평가 받았다. 17세에 사복시 내승에 임명되어 관직에 진출했고, 곧바로 무과에도 급제했다.

초고속으로 출세해 21세(1581년)에는 종3품 경흥부사, 26세(1586년)에는 온성부사에 임명되었다. 1587년 이억기의 첫째 형으로 경원부사였던 이억복이 여진족의 침입으로 전사하자, 여진족을 추격해 시신을 거두었다. 같은 해에 이순신(조산보만호, 종4품)이 여진족의 기습에 대한 누명으로 사형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이순신을 변호하기도 했다. 이억기는 임진왜란 발발 전년인 1591년 순천부사, 전라우수사에 각각 임명되었고, 이순신과 함께 조선의 멸망을 막아냈다.

전쟁 발발 후 이순신과 함께 첫 전투를 한 것은 이순신의 2차 출전이었던 1592년 5월 29일의 사천해전이었다. 그 후 1597년 2월,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파직 및 서울 압송 이전까지 이순신과 동고동락했다. 서울 의금부 감옥에 갇혀 목숨이 위태로운 이순신을 살려내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1597년 7월, 이순신의 후임이었던 원균과 함께 칠천량해전에 참전했다가 일본군에 포위되자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전쟁이 끝난 후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여수 충민사와 해남 충무사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이억기는 순국한 뒤에도 편안히 안식하지 못하고 있다. 엄청난 패전의 결과로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다. 때문에 생전에 입었던 옷가지만으로 아차산(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묘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묘소조차도 구리문화원 측에 따르면, 워커힐 호텔이 건립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신종우의 인명사전>에 묘소가 구리시 아천동 산9-4번지에 있다는 기록이 되어 있어 필자가 실제 답사를 했었지만 찾지 못했다.

서울 망우리공원을 통해 우리나라 근현대 인물사를 정리한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사잇길에서 읽는 인문학>의 작가 김영식 선생은 이억기 장군의 묘소 발견과 관련한 현상공모까지 했으나,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했다 한다.

이억기가 전사한 칠천량해전은 임진왜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전투였다. 이순신은 그와 같은 비극을 예견했기에 출전을 거부했고, 그 때문에 파직과 사형 위기, 백의종군을 해야 했다. 이억기 장군 시신이 남해의 용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육신이 없는 가묘조차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불분명하다. 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에 있는 신도비만이 그의 혼령을 달래고 있을 뿐이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이억기 장군을 그의 자(字)인 ‘경수’로 언급하기도 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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