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를 예측하고 이름을 지어준 할아버지
- ‘순(舜)’ 고대 중국 순임금을 ‘신(臣)’은 항렬자

<충무공의 효성, 현충사 소장>
조선의 문화는 이순신 시대 전후를 중심으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혼례와 제사, 상속이다. 조선은 낡고 부패했고, 무능했던 고려를 극복하고 새로운 이념인 성리학을 기초로 세워진 나라였다.

장가갔던 시대, 시집 온 시대

《주자가례》는 그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규범이었다. 《주자가례》에서 규정한 결혼제도도 고려와 달랐다. 고려시대는 ‘여자가 시집오는’ 형태가 아니라, ‘남자가 장가가는’ 형태였다. 조선은  《주자가례》에 따라 남자들이 더 이상 처가살이를 하지 않도록, 즉 ‘여자가 시집오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삼강행실도》 같은 충효사상 사례가 담긴 책자를 제작·보급해 가부장적 질서도 만들려고 노력했다.

<16세기 양반가의 혼인과 가족관계>를 쓴 김소운에 따르면, 조선 창업 기획자인 정도전은 “당시 여자들이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남자가 장가가는 결혼방식)의 풍습으로 인하여 남편에게 교만한 태도를 가지는 현실을 비난”했다고 한다. 세종도 전례의 결혼제도를 바꾸기 위한 모범을 보이기 위해 몸소 숙신옹주를 윤평에게 시집가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순신 시대까지는 《주자가례》가 규정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조선을 건국한 핵심세력인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공부하고, 주자의 말을 외우고 이야기했고, 또  《주자가례》를 원칙으로 인정했지만 이미 수 천 년 동안 내려온 관습을 바꾸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결혼 허용 법적 연령은 《경국대전》에 따르면, 남자는 15살, 여자는 14살이 되어야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주요 인물들의 결혼 시기를 보면, 남자도 여자도 20살이 넘은 경우가 많았다.

이순신의 경우, 결혼식과 관련된 직간접적인 기록이 사실상 전무하여 이순신이 장가를 갔는지, 부인 상주 방씨가 시집을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아산 현충사에 있는 이순신의 고택이 부인 상주 방씨의 집이라는 점에서 이순신 역시 ‘장가를 간’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율곡 이이도 1557년 5월 초, 아버지 이원수를 따라 장인이 될 성주목사 노경린의 집으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처가에서 생활하며 과거시험 공부를 했다.

처가 제사까지 지냈던 사위들

이순신 시대에는 사위들이 처가의 제사를 지내는 것도 당연했다. 이순신도 장인·장모의 제삿날을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제사를 지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전쟁터에 있는 상황에서도 장인·장모의 제삿날을 잊지 않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있다.

▲ 1594년 5월 29일. 장모님 제삿날이라 좌기하지 않았다.
▲ 1594년 10월 26일. 장인 어른 제삿날이라 나가지 않았다.

이순신이 1597년 2월 파직되고 백의종군을 할 때, 잠시 고향 아산에 들렸을 때도 자신의 집에 모신 장인·장모의 신위(神位)에 절을 했다(1597년 4월 5일). 게다가 그 날 일기에서 이순신은 자신이 장가가서 살고 있던 집을 ‘본가(本家)’라고 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말하는 ‘남편의 본집’이란 의미를 지닌 본가와 다르다.

이순신과 동시대 혹은 그 이전 시대의 다른 사람들도 장인·장모의 제사를 지냈다. 오희문은 임진왜란으로 피난살이를 하면서도 장인의 제사를 지냈다(1592년 5월 22일). 1595년 5월 22일에는 제수물건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해 한탄하기도 했다. 이순신보다 앞 세대 인물인 이문건은 유배지에서 친가는 물론 외가와 처가 제사를 지냈다. 특히 김소운 박사가 이문건 집안의 제사를 분석한 것을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자주 제사를 지냈는지 알 수 있다.

계절마다 지내는 시제(時祭), 설과 추석 등과 같은 명절에 묘에서 지내는 묘제(墓祭), 기일마다 지내는 기일제(忌日祭), 돌아가신 부모의 생신일에 지내는 생휘일제(生諱日祭) 등이 있다. 제사를 지내는 대상도 다양하다. 친가로는 부모부터 고조·고조모, 처가로는 장인·장모, 처증조·처증조모, 처외조부 등, 외가로는 외조·외조모 등이 그 대상이다. 죽은 아들과 딸에 대해서도 제사를 지냈다.

이름 지어준 할아버지 제삿날

이순신의 친필일기와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일기를 비교해 보면,  《이충무공전서》 속의 일기는 아주 건조하고, 사생활 부분이 많이 삭제되어 있다.

▲ 1592년 2월 14일. 맑았다. 아산에 안부를 여쭙기 위해 나장(羅將) 2명을 내보냈다.

2월 14일 일기는 특히 더 그렇다. 그 날은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李百祿)의 기일이다. 1593년 2월 14일 일기에는 “증조부님의 제삿날”이라고 명기했지만, 자신이 한 다른 일들을 세세히 기록해 놓았다. 반면 1594년, 1595년, 1596년은 제삿날이라고 기록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업무로 바쁜 모습이 나온다. 1592년 2월 14일의 일기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평시서 봉사직에 있었던 인물이다. 기존의 통설에서는 이백록이 조광조가 축출되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시련을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서는 기묘사화와 관계없이 성종(成宗) 국상 때 자녀 혼사 문제로 누명을 쓰고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장사(杖死)되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저술한 《이충무공행록》에 따르면 이백록이 이순신의 이름을 지었다. 이순신이 태어날 때 어머니 초계 변씨의 꿈에 이백록이 나타나 귀하게 될 아이이니 ‘순신(舜臣)’이라고 지으라고 했다고 한다. 순신의 ‘순(舜)’은 고대 중국의 순임금을 뜻한다. ‘신(臣)’은 항렬자이다. 이순신의 형들의 이름을 보면, 맏형은 복희씨를 뜻하는 희신(羲臣), 둘째 형은 요임금을 뜻하는 요신(堯臣)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순신이 순신이라고 이름이 지어질 차례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충무공행록》의 이백록 꿈 이야기는 후대에 이순신을 미화하려고 만든 이야기인 듯하다. 이는 이순신의 동생이 우임금을 뜻하는 우신(禹臣)인 것을 보아도 그렇다. 미화를 의도했던 어쨌든 이순신은 자신의 이름에 들어 있는 순임금보다 더 훌륭히 세상을 경영했다. 이순신이 자신의 이름의 의미를 늘 되새기며 살았던 것이 아닐까.

이날 일기 속의 나장(羅將)은 나졸(羅卒)이라고도 한다. 중앙에서는 오늘날로 치면 경찰관과 같은 임무를 수행했고, 지방에서는 경찰 역할은 물론 관아에 배속되어 각종 잡일을 했던 사람이다. 
<박종평 이순신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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