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총통과 입법원(국회) 선거에서 16일 민진당(民進黨)의 차이잉원(蔡英文*60) 후보가 집권여당인 국민당의 주리룬(朱立倫*55) 후보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차이(蔡)의 총통 당선은 대만 정치사상 최초의 여성이라는 데서 세계적 이목을 집중시켰다. 근년 아시아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미얀마 아웅산 수지 여사에 이은 여성 승리란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또한 박 대통령이나 아웅산 수지 여사는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정치적으로 성장했는데 반해 차이 당선인은 스스로 개척한 지도자라는 데서 남다르다.

차이 당선인은 한 때 대만 납세액 10위권에 들었고 다섯 명의 첩을 거느린 재력가 아버지의 11명 자녀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여고 1학년까지는 학업성적이 뒤처졌다. 학급 57명 가운데 51등이었다. 그러나 학년이 오를수록 성적도 올라 대만대 법학부를 거쳐 미국 코넬대 석사학위와 영국 런던경제대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만으로 귀국, 대만정치대 교수로 재직했다. 아버지의 첩에 질려서인지 결혼을 포기해 미혼이다.

차이 당선인은 코넬대 선배인 국민당 소속 리덩휘(李登輝) 총통에 의해 젊은 나이에 통상대표단 일원으로 등용되었다. 이어 첫 민진당 출신 천수이벤(陳水扁) 총통에 의해 각료급인 대륙위원회 주임으로 발탁되었다. 2008년 민진당이 천 총통의 부패 스캔들로 무너지자 민진당 당 대표로 추대되었다. 2012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총통에 6% 차이로 낙선했고 다시 도전해 지난 16일 압승하기에 이르렀다.

차이 당선인의 승리 배경은 두 가지다. 국민당 마잉주 총통의 8년 대만 판 햇볕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과 1%대로 가라앉은 경기침체에 대한 좌절에 연유한다. 마(馬) 총통은 중국밀착 정책을 적극 밀고 갔다. 중국과 20개의 교류협정을 체결했고 교역량도 50%나 늘렸다. 대만의 대중 무역의존도는 30%에 달한다. 한 차례 양국 정상회담도 가졌다.

그러나 국민당의 대중 밀착은 시간이 지날수록 좌절과 부담으로 돌아왔다. 초기 대만 기업인들은 중국에 공장을 세워 관리인으로 지배하거나 고급 기술인력으로 높은 수익금을 챙겼다. 하지만 중국 기업이 발전하면서 역전현상이 나타났다. 도리어 중국 기업들이 대만 기업의 기술과 고급인력을 빼갔고 대만 공장들이 중국으로 옮겨가 대만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았다. 대만 경제는 연평균 5-6%에서 1%로 떨어졌다. 중국에 진출한 대만인들은 정치적으로 친중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대만 안보에 대한 위협이다.

여기에 차이 당선자는 지나친 대중의존도를 비판하며 미국, 일본, 유럽 등과의 관계증대를 주장하며 압승했다. 그러나 5월 출범할 차이 정부의 앞날은 만만치 않다. 차이 정부가 중국의 ‘하나의 중국’ 원칙을 거부하며 대만 독립을 강조할 경우 중국의 거센 반발을 피할 수 없다. 중국의 관영매체는 대만의 “독립 추구는 사로(死路:중음의 길)”라며 협박한다.

대만의 경제문제도 쉽게 풀리기는 어렵다. 대만의 경제성장 동력 상실 요인들 중 하나로 소극적인 기술혁신 기업문화를 빼놓을 수 없다. 세계의 최첨단 산업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는데도 대만 가업들은 소심한 기업문화 속에 갇혀 국제경쟁에서 뒤처진다. 차이 당선인이 선거에서는 쉽게 이길 수 있었으나 경기회복엔 고전을 면할 수 없으리라 예견된다.

차이 당선인은 합리적이며 실용주의적인 구미 교육을 받았다. 아웅산 수지나 박근혜처럼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의 우월적 지위로 인해 체질화된 독존적(獨尊的) 경직성이나 공주병도 없다. 그래서 경제침체나 중국과의 갈등도 합리적이며 실용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첩의 딸로 총통까지 자력으로 올라선 차이잉원 박사의 앞날을 주목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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