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프리랜서 이곤 기자] 곧 그들의 시대가 올 것이다. 벨기에,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와플처럼 촉촉한 이름의 이 나라는 유럽 여행자들에게 꽤 오랫동안 변방의 나라로 인식돼 왔다. 서유럽에서 동유럽으로 여행의 노정이 바뀌고 남유럽에서 북유럽으로 트렌드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이상하리만큼 벨기에는 소외되어 왔다. 벨기에를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벨기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브뤼셀이 가지고 있는 소소한 골목길과 건축물, 겐트의 레이에 강변에서 바라보는 야경, 브뤼헤의 한적한 풍경은 이제껏 우리가 보지 못한 완벽한 그림을 자아낸다.

유럽 연합의 본부가 있어 유럽의 수도로 불리는 브뤼셀. 이른바 한 나라의 수도지만 급박하게 돌아가는 도시인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곳.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지만 전통을 버리지 않고 적절히 조화롭게 여유 있는 삶을 풀어내는 이곳은 벨지안들의 심장이다. 브뤼셀을 느낀다는 것은 벨기에를 이해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벨기에의 따뜻한 심장,
브뤼셀

▲스프레드 요망 스머프 동상 중앙역 앞에 있다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숙소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밖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한 여성에게 길을 물었다. 프랑스 억양이 잔뜩 섞인 영어로 말하는 그녀. 벨기에는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독일어를 함께 사용한다. 다양한 언어로 인해 지역감정이 야기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던 터. 하지만 그들의 문화적 여건과는 상관없이 낯선 여행자가 당황하지 않고 길을 잃지 않도록 친절했던 그녀의 프랑스 억양은 아직도 뇌리를 쉽사리 떠나지 않는다.

알려준 대로 쉽게 역을 찾아 중앙역으로 가는 메트로를 탔다. 차창 밖으로 벨기에의 전경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었음이 실감되기 시작했다. 역에 도착해 비스듬한 언덕길을 내려가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뒤늦은 낙엽이 흩날리는 마들렌느 거리에서 노신사 세 명이 거리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아코디언과 콘트라베이스 그리고 트럼펫으로 이루어진 삼인조 신사들은 벨기에의 재즈 기타리스트였던 장고 라인하르트의 후예답게 모든 곡을 마이너 스윙으로 마무리했다.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던 젊은 여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연주에 맞춰 리듬을 타며 한 바퀴를 돌더니 내 앞을 지나갔다. 낙엽이 제 역할을 다해 자락을 남기고 겨울을 만나는 이때가 어쩌면 벨기에를 여행하는 가장 적기일지도 모른다.

연주의 여운을 안고 브뤼셀의 골목을 찬찬히 거닐자 그 끝에서 첫 목적지인 브뤼셀의 중심인 ‘그랑 플라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곳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극찬했다. 이탈리아의 두오모 광장도 그리고 그의 조국 프랑스의 콩코드 광장도 이곳에는 미치지 못했음을 그의 말을 통해 짐작케 한다.


17세기 후반의 고딕과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로 둘러싸여 있으며 지극히 유럽적인 감성을 자아내는 이곳은 1998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광장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시 청사, 왕의 집, 길드 하우스 등 어느 곳 하나 눈길을 떼기 힘든 건축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었다.

어떤 이는 바닥에 앉아 오후의 햇살을 즐겼고, 또 어떤 이는 주 위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인과 키스를 나누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광장에 녹아나는 듯 했다.

통상적으로 유럽의 문화가 광장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듯이 이곳 역시 주변 거리가 활기를 띠었다. 광장 옆 부셰 거리의 식당과 카페에는 한적한 오후를 즐기는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랑 플라스의 명물인 마차
골목으로 들어가 식당에 들렀다. 점심시간이 지난 까닭인지 호객이 심하다는 이 골목은 약간의 평온을 찾은 것 같았다. 스테이크와 벨기에의 메인 음식으로 불리는 감자튀김을 시켰다. 흔히 프렌치프라이라고 알려진 감자튀김의 원조는 사실 벨기에다.

맥주를 좋아하지 않지만 물론 맥주도 한 잔 시켰다. 독일, 체코와 더불어 세계적 맥주 강국인 벨기에, 그 맥주를 안 마셔볼 수 없었다. 국민맥주라 불리는 주필러가 나왔다. 부드러운 거품과 깊은 풍미, 주필러는 맥주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식사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특별한 방향은 없었다. 그저 걷고 눈으로 담으면 모든 것이 벨기에의 그것이었다. 브뤼셀, 나아가 벨기에의 대표적인 볼거리인 ‘오줌싸개 소년 동상’이 보였다.

▲벨기에를 대표하는 오줌싸개 동상
브뤼셀에서 가장 나이 많은 시민이라고도 불리는 이 동상은 1619년 조각가 제롬 뒤케누아에 의해 제작됐다. 프랑스 의 루이 15세가 브뤼셀을 침략했을 때 이 동상을 탐내 프랑스로 가져갔다가 이후에 사과의 의미로 후작 옷을 입혀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있다.

약 60cm 크기로 생각보다 너무 작아 세계 3대 허무 관광지로 알려져 있기도 한 ‘오줌싸개 소년 동상’. 하지만 동상 앞에 모인 사람들은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빴다. 어떤 사람은 저 동상이 더 컸다면 민망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다시 브뤼셀 서쪽, 앤티크 거리로 알려진 말로 지구의 골목길을 지나 법원 앞 후얄와르 광장에 도착했다. 길모퉁이에서 북아프리카 계열의 한 노인이 아코디언을 켰다. 아련한 감성이 어스름해지는 골목을 서서히 채워갔다. 브뤼셀 사람 중 35% 이상이 이민자라고 한다. 이민자의 슬픔이 그의 연주곡에서 고스란히 전해졌다.

노트르담 뒤 사블롱 성당을 지나 브뤼셀의 골목을 거닐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았을 때, 다시 그랑 플라스 광장으로 갔다. 벨기에에 오기 전 보았던 많은 사진 속에서 가장 빛나던 것. 바로 그랑 플라스의 야경을 보기 위해서다.

황홀 즉, 눈이 부셔 어릿어릿할 정도로 찬란하거나 화려함이라는 단어는 이런 장면에 선사됨이 마땅했다.

그랑 플라스는 어느새 완전하게 옷을 갈아입고 광장의 무대에 올랐다. 이 시간만큼 벨기에의 주인공은 오직 그랑 플라스 광장뿐이니라 사람들은 환하게 불이 켜진 광장 아래에서 낮시간보다 더욱 그랑 플라스를 즐겼다. 여기저기서 셔터가 터졌고 이따금씩 사람들의 탄성이 울렸다.

벨기에 첫날이 준 썩 괜찮은 선물. 나는 그것을 눈 속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찰칵, 그랑 플라스가 망막에 어렸다.

브뤼셀 거리 스케치

벨기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가 만화와 관련된 것들이다. 벨기에는 일본의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고전적 의미에서 최대 만화 강국으로 만화를 제9의 예술로 격상시킨 곳이기도 하다.

국가에서도 이러한 만화를 위해 지원과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벨기에에서는 매년 두 달에 한 번씩 만화 관련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스머프와 유럽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 캐릭터 땡땡(TinTin) 등이 그 토양 위에서 성실하게 자라난 나무들이다.

▲Tintin Gallery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처칠이 언젠가 “나의 유일한 라이벌은 땡땡”이라고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땡땡의 인기는 유럽에서 막강하다. 벨기에 거리 곳곳의 외벽에서 만화로 채운 벽화를 볼 수 있는데, 마냥 가볍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

초콜릿 가게도 즐비했다. 브뤼셀 중심의 건물들에는 우리가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품이나 고급 브랜드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콜릿 가게들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벨기에는 이탈리아, 스위스와 더불어 초콜릿을 세계적인 식품으로 끌어올린 초콜릿 강국이다.

숙소로 돌아가는 지하철에 난데없이 함성이 울렸다. 사람들은 지하철 안에서 맥주를 마셨고 서로 같은 옷들을 입고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누구 하나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늘은 바로 벨기에가 축구를 하는 A매치 날.

세계 축구시장에서 뜨겁게 상승 하고 있는 벨기에 축구. 벨기에에서는 1896년에 프로 축구 리그가 탄생했는데 종주국 영국을 제외하면 유럽 대륙에서는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리그라고 한다.

<사진=여행매거진 고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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