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에서 지주 경영으로 복귀한 속내는?

자본주의는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에 정착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게끔 활발하게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을 벌인 인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초기 한국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질문들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둘러싼 논란만 부각될 뿐, 정작 탐구해야 할 위의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지는 듯하다.

그동안 ‘한국근대자본가연구(2002)’ 등의 저작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 오미일은 근대의 다양한 자본가 군상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배경, 자본 축적 토대와 경로 등 몇 가지 기준에 의해 분류하여 각 유형의 대표적인 자본가들을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2014년 3월 출간했던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는 그 결과물이다. [일요서울]은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의 정착과정을 재구성해본다. 그 두 번째는 ‘경성직뉴주식회사 사장에서 지주 경영으로 복귀한 윤치소 가문 이야기다.

근현대 한국 역사를 살피다보면 해평 윤씨와 도재공파의 인물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우선 갑신정변에 참가했고 군부대신을 지낸 20세손 윤융렬, 그리고 일제 시기 YMCA총무로 기독교 실력양성운동을 주도했으며 전시기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귀족원 의원으로 친일 활동을 했던 기독교계 지식인이자 윤웅령의 아들 윤치호를 들 수 있다.

또한 대한제국 시기 법무 학무국장, 일제 시기 중추원 찬의와 참의를 지낸 윤치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공사·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 비서실장·국회부의장·초대 내무장관 등을 지낸 윤치영도 있다. 22세손으로는 4대 대통령 윤보선, 농림부 장관을 지낸 윤영선을 들 수 있다.

윤치호의 장남 윤일선은 서울대 총장과 원자력원 원장·학술원 회장을 지낸 학계의 저명인사이며 그 후손들은 주로 의학계와 교육계에서 활동했다. 이들이 한말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명문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 기본적으로 든든한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다.

이들 윤씨 가문의 선대는 고려 후기에 신흥 귀족가문으로 성장했으나, 조선 초기에는 하급 무인가문으로 전락했다. 이후 조선 중기 해평부원군 윤두수가 영의정을 지내는 등 고위 관직자를 다수 배출해 명문으로 부상했으나, 18세기 말 이후 잔반으로 몰락했다. 결국 윤치소의 증조부(윤득실) 때 고향인 수원을 따나 천안으로 낙향했다.

윤득실의 셋째 아들인 윤취동은 이후 분가해 충남 아산 음봉면 동천리로 이주했다. 윤취동은 근념함으로 농업에 힘써 융년에 이웃사람들의 환곡을 대신 납부해줄 정도로 천석지기 대지주가 되었다. 윤취동이 이룬 이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윤치소의 숙부 윤웅렬이 법부대신·군부대신을 지내고, 부친 윤영렬이 강계부사 겸 방어사·삼남토포사·육군 참장을 지내면서 19세기 중반 이후 윤씨 일가는 신흥 무인가문으로 부상했다.

이 중 가장 이재에 밝아 금융, 기업 투자, 농업 경영 부문에서 활동이 두드려졌던 이가 윤치소다. 윤영렬의 8남 4녀 가운데 둘째인 윤치소는 형제 가운데에서는 가장 재산을 늘리는 데 소질이 있었다. 그의 장남 보선은 1945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을 거쳐 1948년 서울시장, 1949년 상공부 장관, 1953년 이후 국회의 진출해 민주당 구파로 정치생활을 하게 된 데에는 대지주라는 집안 배경, 즉 부친 윤치소로부터 물려받은 물적 토대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윤치소 일가의 일제 시기 자본 축적 과정은 이와 같은 한국 근현대 정치 전개와 경제적 배경의 연계를 고찰하는 데도 좋은 사례다.

한말, 기업투자와 경영

한말 윤치소의 경제활동은 크게 보안 기존의 농업 경영과 대부업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당시 부호들의 일반적 투자 관심사였던 광업권을 매득했고 나아가 금융업과 제조업으로 투자 범주를 확대해나가는 특징을 보인다. 당시 30대의 그는 경제 활동에서 매우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예로 농업 경영에서도 향리인 아산에 머물지 않고 1909년 여름 평안북도 연변에 1500정보의 토지를 매입했다.

그런데 여기에 소요되는 20~30만 원의 막대한 자금은 윤씨 일족이 조달했는데, 농업 기술 상의 문제 때문인지 일본인과 동업으로 진행했다.
또 한말~일제 시기에 일반적으로 그러했듯이 치호는 정치 분야로 진출했고 차남 치소는 집안의 경제를 맡기 위해 경제 분야에 주력했다. 그 후대를 보더라도 윤치소의 장남인 보선은 영국 에든버러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해 정치·문야 분야에서, 차남인 완선은 교토제국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 분야에서 활동했다.

윤치소의 자본 축적 과정은 대략 1909~1920년의 기업 투자와 경영, 1920년대 이후의 농업 경영과 토지 직접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아산에서 직접 종장을 경영하고 있었던 윤치소는 1908년 무렵 서울로 완전히 이전했다. 곧이어 경성혁신점을 설립·경영하는 한편. 해직 군인들이 전당포 영업을 위해 설립한 조합을 자본금 50만 원의 광업주식회사로 재편했다.

또한 직물업자들의 조합을 자본금 10만 원의 경성직뉴주식회사로 재조직해 사장에 취임했다. 소규모 조합을 당시의 가장 대표적인 기업으로 재조직해 오랫동안 경영한 것에서 발군의 사업 수완을 엿볼수 있다. 그러나 많은 조선인 기업이 폐업했던 1919~1920년 공황 시기에 윤치소도 기업 투자와 경영에서 손을 떼고, 이후 토지 집적과 농업 경영에 주력했다.

그가 가장 많은 토지를 보유했었던 때는 1935년으로 약 1182정보의 경지를 집적했다. 그러나 1942년에는 1936년 대비 61%감소했다. 하지만 전시기 인플레로 토지 가격이 두 배 이상 상승해 자산가치는 크게 증가했다.
이후 윤치소는 토지 집적과 농사경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 한성은행과 거래했는데 저리의 동척 대부금으로 식산은행 차입금을 변제하면서 1935년 이후 모든 금융거래가 동척으로 일원화되었다. 금융기관의 차입비율은 토지 집적이 가장 활발했던 1930년대 초에 가장 높았다.

윤치소의 자본 축적 과정을 요약하면, 한말에 선도적인 기업 활동을 전개했으나, 1차 세계대전 이후 공황기에 사업 성과가 부진하면서 모든 기업투자와 영업을 정리했다. 1920년대 이후 자본 축적의 주요 수단을 토지 집적과 농업 경영으로 전환하고, 생산성 증가를 위해 소작인 지도를 통한 농사 개량에 주력했다.

윤치소 역시, 토지 경작에서 나오는 수익과 주식 증권에서 받는 수익을 비교해보면 토지 수익이 휠씬 낫다고 생각했던, 영보합명회사 사장 민규식과 동일한 경제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1940년대 전시기에 공출제가 실시되면서 변화돼 국책기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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