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거리에서 … 벨기에 두 번째 여정

▲ 겐트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겐트의 야경
어떤 이는 브뤼셀에서 한 실망을 그곳에서 되돌려놓을 수 있었다고도 했다. 파란 하늘, 하얀 건물 그리고 울긋불긋한 박공지붕들. 조용히 흐르는 운하와 한적한 공원. 겐트는 나에게 인상주의 풍경화들처럼 밝은 이미지로 다가오고 있었다. 겐트를 수식하는 이름은 많다. 벨기에의 네덜란드, 자전거의 천국, 그리고 꽃과 교육의 도시. 그러나 무엇보다 겐트를 설명하는 단어는 딱 하나이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비밀의 사랑. 그 힌트는 겐트를 여행하는 하루의 끝자락에 가서야 알 수 있다.

중앙역에서 겐트로 향했다. 기차는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무척 한산했다. 브뤼셀에서 고속 기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30분 정도가 걸리는 곳. 나는 빨리 가는 방법을 버리고 일부러 완행을 타고 가기로 했다. 벨기에의 작은 역들과 목가적인 풍경이 창가를 스쳤다. 중세의 느낌이 온 도시를 뒤덮는 조그마한 도시인 겐트. 겐트 역에 도착해 트램을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백작의 성, 흐라븐스틴

▲ 흐라븐스틴 성
겐트가 교육의 도시임을 알리듯 거리에는 학생들이 대부분일 정도였고 도로에는 자전거와 트램, 자동차와 사람들이 한꺼번에 섞여 다녔다. 물론 부딪힘은 없었다. 극도의 배려와 존중. 그것이 겐트에 들어오고 난 후의 첫인상이었다.

겐트의 중심부에 내려 흐라븐스틴(Gravensteen) 성으로 향했다. 중세 시대 백작의 성곽으로 쓰이다가 박물관으로 용도변경된 이 성의 무게감은 도시의 중심을 잡아주는 듯했다.

겐트 자체가 이 성을 중심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이 성이 겐트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중세로 향하는 듯한 견고한 분위기의 입구가 그런 유추를 가능하게 했다. 거친 돌들이 놀랄 정도로 질서 있게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겐트 시내의 중세 건축물들은 모두 큼직하게 지어졌다고 한다. 13세기 이 전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방직 산업이 도시에 막대한 부를 안 겨준 덕으로 당시 겐트는 유럽에서 파리 다음으로 번성했다고 한다.

성은 그간 교도소와 법원, 공장 등 여러 용도로 사용돼왔고 고문실로도 쓰였다. 내부에는 실제로 쓰인 다양한 고문 기구들과 단두대가 전시돼 있어 현실감을 더했다. 성 꼭대기 층에서 겐트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고 해 오르기로 했다.

겐트를 대표하는 세 곳의 기념비적 스카이라인인 성 니콜라스교회와 종루 그리고 바프대성당이 모두 한 포인트에 담긴다. 파란 하늘 아래 뾰족하게 솟은 상징과 기호들. 겐트 사람들의 남다른 회화적 감각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 겐트 운하 체험 스프레드 요망
성에서 나와 조용하게 흐르는 운하를 끼고 중심부로 나왔다. 이 조용한 도시를 흐르는 강이자 겐트의 또 다른 핵심인 레이에강이다. 이 강을 기준으로 겐트는 위쪽의 흐라슬레이(Graslei)와 아래 동네인 코렌레이(Korenlei) 라고 불리는 두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예전 길드 건물들의 고풍스러움과 운하를 흐르는 배 한 척의 한적함은 겐트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남는다.

‘어린 양에 대한 경배’가
 모셔진 성바프 대성당

겐트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가치를 두는 곳인 성 바프 대성당은 브뤼셀의 미셀 대성당보다 더 웅장했다. 세계적인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의 작품이 성물처럼 보관되어 있어 더욱 유명한 이곳은 처음에는 목조건물로 시작되었으나 차츰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양식이 혼재되어 증축되었다고 한다.

▲ 성 바프 대성당 성당 앞, 반 아이크 형제의 동상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던 빛은 이 성당의 중후함에 엄숙함을 더했고, 성당 전체에 울리던 오르간 연주는 그 엄숙함에 경건함을 입혔다. 아쉽게도 성당 전체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했다.

얀 반 에이크의 작품 ‘어린 양에 대한 경배’를 볼 수 있는 별실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 하지만 성당 뒤편으로 가면 사진 촬영이 가능한 복제화를 감상하는 공간이 따로 있다. ‘어린 양에 대한 경배’는 플랑드르 화풍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명작이며 인류의 유산이라 칭해도 좋을 정도로 종교화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이탈리아와 러시아에서 온 신자들은 작은 복제품임에도 불구하고 환희와 숭배로 그 기록적인 그림을 대했다.

또 하나의 세상,
겐트의 야경

겐트의 저녁은 비교적 일찍 시작되는데, 레이에 강변에서 뜻밖의 광경을 마주했다. 그것은 강 주변으로 펼쳐진 겐트의 야경이었다. 벨기에를 여행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브뤼셀의 그랑 플라스 야경에 집중했던 탓인지 이곳의 야경에 대해선 별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겐트에서 보여주는 이 어스름한 저녁의 풍경은 단숨에 겐트를 중세에서 동화 속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만약 시간에 단계라는 것이 있다면 이 시간이 태초의 것이 아닐까. 그만큼 겐트의 야경은 맑고 무구했다.

▲ 겐트 레이에 강변
그랑 플라스의 야경은 밤의 무대가 열릴 때를 기다려 정성스럽지만 의도적으로 차려입은 Show 같은 면이 있었으나, 겐트의 야경은 본연의 모습 그대로 꾸밈이 없었다. 강 주변의 호텔들과 상점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마치 빛의 요정처럼 저녁 하늘에 떠다녔고 레이에 강은 그 빛들을 다시 수면 위에 펼쳐 놓았다. 그것은 반짝반짝 빛나던 반딧불이 같기도 했고 은하수에서 떨어져나온 오래된 별똥별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비밀 세트장처럼도 보였다.

▲ 겐트는 저녁 풍경
반대편 하늘이 짙어질수록 라스트 신은 더욱 분명하게 여울져갔다. 사람들은 강 주변에 앉아 한적하고 고즈넉함으로 점철되었던 겐트의 낮 대신 낭만과 사랑으로 수놓인 밤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겐트가 주는 꿈같은 시간. 그것은 벨기에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겐트에서는 마지막까지 레이에강의 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프리랜서 이곤 기자>

<사진제공=여행매거진 고온 G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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