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국 경제 침체로 수입 줄면서 한국 등 타격
시장전망 실패한 에너지 업체들, 석유 과잉생산

[일요서울 | 곽상순 언론인] 원유 값이 내려가면 휘발유와 경유 등 석유제품 값이 자동적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자동차 운전자들은 이득을 본다. 하지만 저유가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산유국들의 경제가 크게 타격을 받으면서 전반적으로 수입을 줄이기 때문에 한국처럼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들은 장기적으로 피해를 입는다. 2014년 7월부터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한 원유 값은 어떤 구조적인 요인에 의해 오늘날 배럴당 30달러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까지 폭락했는가. 미국의 자원 전문가가 이런 의문에 속 시원한 설명을 들려준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州) 앰허스트 소재 햄프셔대학의 마이클 T. 클레어 교수는 최근 미국 언론에 기고한 ‘석유 가격지진(Pricequake)’이라는 소논문에서 이번 저유가 사태의 배경으로 ‘재래식 석유’와 ‘비(非)재래식 석유’ 간의 경쟁을 들었다.

2014년 세계 석유가의 기준인 브렌트유는 배럴당 115달러에 팔렸다. 당시 에너지 분석가들은 유가가 상당 기간 100달러 이상을 유지하리라 전망했다. 그러자 거대 에너지 기업들이 ‘비재래식 원유’를 채굴하는 데 수천억 달러를 투자했다.

비재래식 원유의 원천은 ▲북극 원유 ▲캐나다의 타르샌드(원유를 머금은 모래 덩어리) ▲심해유전 ▲셰일(원유를 머금은 바위)을 말한다. 당시 석유 사업가들은 이런 추가 원유를 채굴하면 수익이 짭짤하리라 생각했다. 비재래식 원유 채굴비용이 배럴 당 50달러에 도달하리라는 사실은 당시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원유시세는 배럴당 30달러까지 떨어진 상태다. 이것은 원유를 생산할수록 손해라는 의미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현유가가 50~60달러를 회복하려면 2020년대까지, 85달러를 회복하려면 2040년까지 기다려야 하리라고 본다. 이런 시나리오는 석유산업에 거금을 쏟아부은 기업이나 정부에 악몽이다.

이득은 자동차 운전자뿐

나이지리아·사우디아라비아·러시아·베네수엘라는 이미 저유가의 저주에 휩싸여 있다. 저유가 상황이 길어질수록 그만큼 더 파멸적인 결과를 맞을 수 있다.

석유시세도 다른 원자재 시세와 마찬가지로 수요-공급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2008년 7월 배럴당 143달러였던 유가(브렌트유 기준)는 세계금융위기를 거친 그해 12월 34달러로 폭락했다. 그러다 2009년 10월 77달러로 올랐다가 2011년 2월 100달러를 돌파해 2014년 6월까지 고공 행진했다.

당시 석유시세가 회복된 것은 무엇보다 중국이 경기부양을 위해 도로·교량·고속도로 같은 인프라 투자를 크게 늘렸기 때문이다. 중국 중산층의 자가용차 소유 붐도 석유 수요를 부추겼다.

2008~2013년 기간 중 중국의 석유소비는 35% 늘었다. 급속히 발전 중이던 인도와 브라질에서도 석유소비가 늘었다. 이런 가운데 재래식 원유 생산은 줄기 시작했고, 비재래식 원유 생산은 늘었다.

2014년 초 미국과 캐나다의 비재래식 원유가 본격적으로 시장에 쏟아지면서 유가가 순간적으로 방향을 반대쪽으로 틀었다.

1990년 750만 배럴이었다가 2010년 1월 550만 배럴로 떨어졌던 미국의 하루 원유 생산량이 갑자기 늘기 시작해 2015년 7월 960만 배럴에 이르렀다. 이는 물론 셰일오일 덕분이었다.

캐나다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2008년 320만 배럴이던 하루 생산량이 2014년 430만 배럴로 뛰었다. 여기에다 브라질과 서아프리카가 대서양에서 석유를 퍼올렸고, 전쟁으로 갈가리 찢긴 이라크가 전쟁의 참화를 딛고 하루 100만 배럴을 증산했다. 최근에는 서방의 경제제재에서 풀린 이란이 석유수출 시장에 복귀했다.

이처럼 원유생산은 크게 늘어난 반면 중국의 경기 자극책이 약발이 다한 데다, 미국·유럽·일본의 경기침체로 중국산 제품에 대한 수요가 줄었다. 중국의 석유 수요는 앞으로도 미약하게나마 늘기는 하겠지만 이전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다 미국에서 자동차 연비가 놀라울 정도로 개선됐다. 금융위기를 겪은 오바마 정부는 자동차 회사들에 연비 개선을 강력 주문했고 이것이 먹혀들었다. 백악관은 오는 2025년까지 미국산 승용차의 연비를 갤런(3.8ℓ) 당 54.5마일(87.2㎞), 즉 리터 당 23㎞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렇게 해서 지금부터 2025년까지 미국 내 석유 소비를 모두 120억 배럴 줄이겠다는 것이다.

석유 의존도 감소 확실

석유시세가 속절없이 추락하고 있지만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맏형격인 사우디아라비아는 과거와 달리 감산(減産)을 통해 석유 값을 부추기는 전통적 대처방안을 채택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우디가 자신도 고통스러우면서 감산을 거부하는 데에는 ▲사우디의 원유 채굴 비용이 상대적으로 낮으며(배럴당 11달러) ▲상대적으로 많은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고 ▲이참에 시리아 정권을 돕는 같은 산유국인 이란·러시아를 낮은 유가로 손보겠다는 생각이며 ▲무엇보다 미국의 셰일오일이 자리를 잡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한다는 전략이 그 배경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우디의 이런 셰일오일 고사(枯死)작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셰일오일 생산자들은 기술·경영 개선을 통해 미국이 1년 전보다 약간 더 많은 하루 92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미국의 원유생산이 전혀 줄지 않는 가운데 핵협정 타결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에서 곧 풀리게 된
이란이 원유 증산 대열에 이라크와 함께 합류함에 따라 지구촌의 원유 과잉 현상은 더 심화될 판이다.

특히 이라크는 현행 하루 300만 배럴인 생산량을 최대 900만 배럴로까지 늘릴 가능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클레어 교수가 보기에 산유국 입장에서 정작 우려스러운 것은 현재의 낮은 수요가 아니라 석유 자체가 매력을 잃기 시작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중국과 인도의 신흥 부자들은 앞으로도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자동차를 계속해서 구입하겠지만, 선진국 소비자들 가운데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하이브리드 자동차나 전기차, 또는 대체 교통수단을 선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다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자동차 배기가스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젊은 도시 거주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자동차 없이 자전거와 대중 교통수단에 의존하고 말겠다는 환경보호론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태양·바람·수력을 이용한 재생가능 에너지의 개발과 활용은 각국 정부의 적극적인 육성방침에 힘입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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