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李哲承) 전 신민당 총재(대표최고위원)가 지난달 27일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그는 1970년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세 명의 “40대 기수”들 중 김영삼·김대중은 후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 총재는 대통령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94평생을 오로지 반공과 자유민주체제 수호를 위한 투쟁으로 일관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보성전문(고려대)의 역도선수였다. 8.15 해방공간의 혼돈속에 좌익분자들이 폭력을 휘두르며 날뛰던 시절 ‘전국학생총연맹’ 위원장으로 앞장서서 그들과 맨주먹으로 맞서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이 총재는 1998년 박갑동·이철승 공저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를 펴내면서 서울프레스센터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나에게 축사를 부탁하기에 나는 이 총재가 한국 ‘최초의 대학생운동 지도자’였고 ‘대부’였으며 자유민주체제 수호를 위한 ‘불퇴전의 반공투사’라고 했다.

그는 1954년 3월 3대 민의원 선거 때 고향인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7선 기록을 세웠다. 그 해 11월 국회가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단상으로 뛰어올라가 최순주 부의장의 멱살을 잡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항의했다. 1973년 국회부의장, 76년 신민당 총재가 되었다. 그는 5.16 박정희 군사쿠테타 후 정치규제에 묶여 10년간 해외로 떠돌았다. 귀국 후 그는 1972년 반유신독재 투쟁에서 김영삼·김대중과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그는 독재권력과는 맞서 싸우되 안보에선 협력해야 한다는 “중도 통합론”을 내세웠다. 하지만 김영삼·김대중 측에서는 그를 ‘관제 야당’ ‘사쿠라’라고 매도했다.

이 총재는 신민당 총재시절인 1977년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를 단행코자 하자 미국 의회를 방문, 대학 기숙사에서 쪽잠을 자면서 미군철수 반대 외교를 펼쳤다. 신민당내에서는 그를 또 ‘사쿠라’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나라가 있어야 여당도 야당도 있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낙선, 국회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그 후 야인으로 80-90대의 노구를 이끌며 반공과 자유체제수호 운동을 장렬히 주도해갔다.

특히 이 총재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처음부터 격렬히 비판하며 반대했다. 김 대통령과 친북세력의 위세에 눌려 정치인·지식인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을 때 그는 우뚝서서 햇볕정책을 반대했다. 재정난으로 휴간했던 월간지 ‘民族正論(민족정론)’을 사재를 털어 1999년 10월 ‘民族正論소식’으로 재창간, 햇볕정책 비판의 기관지로 삼았다.

이 총재는 2001년 10월호 ‘民族正論소식’에서 햇볕정책 강행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를 자초한’ 김대중 대통령을 ‘탄핵하고 하야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공영방송 KBS와 MBC의 좌편향 제작 작태를 공개 규탄하곤 했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햇볕·포용정책’에 길들여진 탓인지 조용했다. 이 총재는 10년에 걸쳐 대한민국이 친북좌편향으로 기울어갈 때 변변한 우군도 없이 온몸으로 막아선 버팀목이었다. 그는 좌편향측에서 폄훼하는 대로 ‘극우’가 아니었고 ‘불퇴전의 반공 보수우익 투사’였다.

이회창 전 총리는 27일 빈소를 찾아 이 총재가 “나라가 혼란스울 때 방향을 잡고…중심을 잡아 나라의 갈 길을 제시해주신 분”이라고 했다. 이철승의 정치적 소신은 분명했다. 국가안보에선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신념, 그 것이었다. 국가안보를 위해선 ‘사쿠라’란 매도도 개의치 않았다. “나라가 있어야 야당도 있다”는 안보관은 오늘 날 운동권은 물론 여야가 본받아야 할 기본자세이다. ‘최초 대학생운동 지도자’이며 ‘대부’인 이철승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반공과 자유체제수호 정신은 영원히 살아 숨 쉬리라 믿는다.

■ 본면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