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

1991814.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최초로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열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위안부 피해자의 공개증언이 처음으로 나온 것이다. 이를 계기로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 초반 한·일 간 최대 현안으로 부상했다. 위안부 문제 해결에 진전이 없으면 한일관계의 유지도 어려운 상황까지 발전한 것이지만 일본에서는 문제해결과 거리가 먼 여론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미 1965년 한일협정으로 보상 문제는 다 끝났는데 보상을 더 받으려는 목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계속 제기하는 것 아니냐는 잘못된 인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93225일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낼 필요성이 커졌다.
 
출범 17일 만에 탄생한
도덕적 우위조치
 
김영삼 정부 출범 당일 국장이 된 유병우 당시 외무부 아주국장은 새 정부의 기세를 이용해 일을 해야 한다면서 곧바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때부터 구상한 안을 추진했다.
 
일본이 아니라 우리 정부가 나서서 위안부 피해자에 보상을 해주자는 내용이었다.
 
그는 당시 한승주(75) 외무부 장관으로부터 먼저 승인을 받은 뒤 청와대 수뇌부 설득에 들어갔다. 당장 예산이 들어가는 일인 데다가 업무 자체는 복지부 사업 성격이 강해 청와대의 총괄적인 조정이 필요했다. 박관용 비서실장과 김정남 교육문화 수석 등과 수시로 협의해 이런 일을 초고속으로 진행시켰다. 우리가 도덕적인 우위에 서서 이런 조치를 해야 한다는 설득에 청와대 인사들도 같이 움직인 것이다.
 
결국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313일 수석 비서관회의에서 일본 정부에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방침으로 이에 대한 보상은 내년부터 정부 예산에서 하라면서 그렇게 했을 때 도덕적 우위를 갖고 새 한일 관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시했다.
 
유 국장이 도덕적 우위 조치 마련에 들어간 지 17일 만에 결과물이 나온 것이다.
 
우리 측의 이런 조치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이 보상 문제로 흐려지는 것을 막으면서 일본에 도덕적인 타격을 주는 효과를 보였다. 당장 피해자의 보상 요구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적지 않았던 일본에서 선수를 뺏겼다는 반응이 나왔다. 보상을 앞세워 책임 인정 문제를 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일본측 내부 평가도 나왔다. 실제 일본은 당시 피해자에게 지원하기 위한 기금(추후 아시아평화여성기금으로 1995년 발족)을 민간단체를 통해 조성하기도 했다.
 
정부의 직접 보상은 책임 인정 문제가 따르기 때문에 민간단체를 통한 인도적 지원이란 수를 쓴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적 우위 조치로 위안부 이슈의 흐름이 바뀌었다.
 
보상 국면에서 일본이 정부의 책임을 인정해야 하는 국면으로 판이 바뀐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측 내에서는 건국 이래 가장 신선한 외교적 이니셔티브”(홍순영 당시 외무차관)라는 평가가 나왔다.
 
총체적으로 본인 의사에
반했다, 강제동원 첫 시인
 
199384일 일본은 처음으로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하는 정부 발표를 내놨다.
 
위안부 이슈가 불거졌을 때 일본은 정부나 군이 관여한 바 없으며 강제동원도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 1992년 군이 관여한 것까지는 인정(가토 담화)했지만 여전히 강제동원 여부는 모른다는 태도를 취했는데 이보다 더 진전된 입장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이 정부 대표로 내놓은 것이다. 이 담화는 우리 정부가 도덕적 우위 조치를 법제(일본군 위안부 생활안정지원법)화한 지 한 달여 만에 나왔다.
 
작년 12월부터 조사를 진행했는데 이번에 결과가 정리돼 발표한다는 것을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웠지만, 우리 정부의 도덕적 우위 조치로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나온 결과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실제 고노 담화를 발표하기 전까지 한일 외교채널 간에는 담화문 표현을 놓고 물밑 협의가 있었다. “일본이 알아서 할 문제라는 게 당시 유 국장의 생각이었지만 관례에 따라 도쿄에서 외교 협의가 진행됐다. 협의는 발표 진전까지 계속됐다. 끝까지 남은 문제는 강제동원 부분의 표현이었다.
 
일본 측에서는 ‘100% 다 강제동원은 아니다는 인식이 강했고 이런 이유로 대체로 본인 의사에 반했다는 것을 사실상 마지노선으로 삼았다. 이런 입장차로 양측 간 교섭은 난항에 빠졌다. 외교부 일각에서는 일본의 완고한 입장을 감안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자는 현실론도 나왔다. 유 국장은 교섭 담당자에게 며칠밤만 더 새워라면서 우리 입장을 그대로 사수하라고 거듭 지시했다. 결국 며칠 뒤 일본은 “(위안부의)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강압에 의한 것으로, ‘총체적으로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실시됐다는 안을 가져왔다. 유 국장은 그때야 이 안을 수락했다.
 
당시 교섭을 지시한 유병우 전 터키 대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어에서는 총체(일괄)적이란 말과 전체(개별의 합계)적이란 말을 구별해서 쓰기는 하지만 그 정도 표현이면 99%는 됐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일본이 그나마 총체적이란 표현을 찾는 노력을 한 데는 고노 장관의 성향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자민당 내에서는 다소 진보적이었고 과거 문제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총리도 대학은
나왔을 것 아니냐
 
고노 담화가 발표된 뒤 석 달여 뒤인 116일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첫 한일 정상회담이 경주에서 열렸다.
 
관례대로라면 이 회담을 앞두고도 한일 간 과거사 문제에 대한 교섭을 해야 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일본 총리의 첫 방한인 만큼 과거사 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언급해야 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언급하고 이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할지를 사전에 미리 조율, 정상회담에서 사고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우리 측은 이 문제에 관한 교섭을 하지 않았다. 유 국장의 지시에 따른 조치였다. 회담을 며칠밖에 안 남긴 상황에서 일본 외무성 아주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제라도 교섭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요구였다.
 
유 국장은 일본 수상(총리)도 대학은 나왔을 것 아니냐. 나는 수상의 철학을 듣고 싶다면서 만약 수상의 발언이 만족스러우면 우리 국민이 아낌없이 평가할 것이고 잘못된 발언이면 일본이 뒷감당을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전 교섭을 생략한 채 정상회담의 날이 밝았고 김영삼 대통령과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 간의 경주 회담이 진행됐다. 분야별로 대화를 이어가다 과거사 부문에 대해 이야기를 할 차례가 됐다. 배석한 한일 국장 사이에도 긴장감이 흘렀다. 호소카와 총리는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쪽지 한 장을 꺼냈다. 제목 정도만 적은 간략한 메모였다.
 
호소카와 총리는 쪽지를 참고해가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의해 한국인이 모국어 교육 기회를 박탈당하고 이름을 일본식으로 개명당했으며 종군위안부, 징용 등 여러 형태로 괴로움과 슬픔을 당한 데 대해 가해자로서 마음으로부터 반성하며 깊은 사죄를 드린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행위까지 언급한 전향적인 사과 발언이었다.
 
이 발언은 1995년 발표된 무라야마(村山) 담화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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