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더, 다양한 사람 모으고 모이게 하는 사람- 31살 어린 후배상관 모시며 '불멸 이순신' 만들어

정걸장군 <고흥방송국 사진자료>
《난중일기》와 그의 보고서를 읽다보면, 누구나 곧바로 알 수 있는 위대한 리더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의외의 장면에서 “아! 이래서 이순신이구나!”라고 감탄하게 만드는 리더 이순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성공한 리더에게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성공한 리더! 단순히 사회에서, 국가에서, 특정 분야에서 성공한 리더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삶에서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당당하고, 멋지게 사는 사람이라면 그들 모두 성공한 리더이다. 그들은 모두 그들 주변에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있다. 그것이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 1592년 2월 21일. 맑았다. 공무를 처리한 뒤, 주인(主人)이 자리를 깔아놓아 훈련용 화살을 쏘았다. 정 조방장(丁助防將)이 와서 만났다. 황숙도가 와서 같이 취했다. 배수립도 나와서 같이 술잔을 나누었다. 아주 즐거웠다. 밤이 깊어 파했다. 신홍헌을 시켜 빚어놓은 술을 전날 심부름했던 삼반(三班) 하인(下人) 등에게 나누어 마시게 했다.

일기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주인, 정 조방장, 황숙도, 배수립, 신홍헌, 삼반하인. 주인은 흥양현감인 듯하다. 일부 번역본에서는 주인을 “감영과 고을의 연락을 담당하는 영저리(營邸吏)”, 즉 아전 부류로 보았지만 일기의 전후 상황과 문맥, 조선 시대의 관행을 살펴보면 흥양현의 주인, 즉 흥양 현감 배흥립이라고 볼 수 있다. 하급관리인 영저리가 전라좌수사를 비롯한 수령들을 영접할 수는 없다. 황숙도(黃叔度, 1540~?)는 당시 능성 현감이었던 황승헌(黃承憲)이다. 능성은 오늘날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일대이다. 배수립(裵秀立)은 흥양 현감 배흥립의 동생이다.

신홍헌(申弘憲)은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난중일기》에 모두 5차례 등장한다. 그가 등장하는  때는 대개 군량미와 관련된다. 1595년 6월 19일 일기에는 “신홍헌 등이 들어와서 보리 76섬을 바쳤다.”고 했다. 이순신의 수군에게 어떤 이유에서인지 군량미를 바쳤다. 1594년 7월 10일 일기에는 이순신이 낙안과 광양에서 바친 벼의 수량을 확인했는데, 그날 신홍헌이 들어왔다.

신홍헌이 보리 76섬을 바치기 전 날인 1595년 6월 18일에는 진주 유생 류기룡과 하응문이 군량을 모아 바치는 일을 하고 싶다며 쌀 5섬을 받아갔었다. 신홍헌이 처음 등장한 2월 21일 일기에서도 이순신은 신홍헌을 시켜 술을 삼반하인들에게 나눠주게 했다. 이런 정황을 보면, 신홍헌은 전쟁 이전부터 이순신과 인연을 맺으며, 이순신 부대를 물질적으로 후원했던 인물로 보인다. 그러나 1595년 6월 21일 이후 《난중일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신홍헌은 자발적으로 이순신을 돕는 사람들의 상징인물이다.

갑질 대신, 아랫사람을 모시는 사람

이날 일기에 등장하는 삼반하인은 지방 관아 소속의 아전, 군대 노비, 사령, 급창 등을 통칭하는 말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관노비는 병마절도사 진영에는 200명, 수사 진영에는 120명이 배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주 소수였던 듯하다. 유희춘의 1571년 8월 20일 일기에도 “전라좌수영의 영노비(營奴婢)와 영일꾼(營役者)가 모두 19인”이라고 했다.

이순신의 2월 21일 일기 속 삼반하인 관련 기록, “빚어놓은 술을 전날 심부름했던 삼반하인 등에게 나누어 마시게 했다.”는 것은 그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이다. 자신을 수행하며 고생하는, 혹은 높은 사람들을 수발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배려하는 리더의 모습이다.

사람들을 차별하며 ‘갑질’하는 사람들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리더 이순신의 진면목이다. 이는 전쟁이 일어난 뒤, 그가 쓴 각종 보고서를 보아도 증명된다. 양반이든 평민이든 노비이든 성실하고 책임을 다한 사람을 인정하고, 그들의 공로를 자세히 기록해 포상을 받도록 했다. 또 자신보다 높은 사람일지라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 서슴없이 비판하기도 했다.

판옥선을 만든 맹장

일기 속 정 조방장은 정걸(丁傑, 1514~1597) 장군이다. 당시 79세였다. 이순신보다 무려 31살이 많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엄청난 나이다. 그런 그가 이순신의 참모격인 조방장이었다. 조방장은 주장(主將)을 도와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로 군사 재능을 갖춘 사람이 임명되었다. 이순신도 훗날 부하장수들이 다양한 이유로 파직되었을 때, 조정에 건의해 그들의 능력에 따라 조방장에 임명케 해 함께 활약했다.

이순신을 만든 멘토로 가장 많이 언급할 수 있는 인물이 류성룡이다. 그러나 전쟁 전과 전쟁 중 이순신에게 야전에서 실제로 도움을 준 멘토는 정걸로 보인다. 정걸의 경력과 전쟁 기간 중 활동 내용을 보면, 정걸 외에 다른 인물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정걸의 경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고흥 출신으로 이순신이 태어나기 1년 전에 무과에 급제했다. 그 이후 평생을 왜구와 여진족과 상대했다. 1555년 을묘왜변 때, 전라도 도순찰사 이준경의 군관으로 가장 먼저 현장에 달려가 군대와 민심을 수습했고 달량전투에서 왜구를 격파했다. 이듬해에는 남도포 만호로 초도에 정박한 왜구들을 홀로 진격해 붙잡았다. 그의 공로를 다른 이가 가로챘지만,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1569년에는 전라도 부안 현감과 함경도 온성 부사에 임명되었다. 1572년에는 경상 우수사와 경상도 병마절도사, 1574년에는 다시 함경도 종성 부사, 1575년에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경상도 창원 부사, 1577년 전라 좌수사, 1579년 경상 좌수사, 1582년 장흥 부사, 1583년 전라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1555년, 역사에 처음 이름을 남긴 이래 20년 정도를 남쪽과 북쪽, 경상도와 전라도의 모든 변방에는 그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임진왜란의 신화를 만든 조선 주력전선인 판옥선을 만들었고, 이순신의 주특기인 분멸(焚滅), 즉 일본군 배를 불태워 없앨 수 있게 만드는 화공무기인 화전(火箭, 불화살)도 개발했다고 한다. 바다와 육지의 모든 전투를 다 경험한 용장(勇將)이며, 무기의 중요성까지도 알았던 지장(智將)이기도 했다.

그런 백전노장이 고향에 은퇴해 있다가 77세의 고령에 나라의 부름을 받아 이순신의 조방장이 되었고, 이순신과 함께 조선 수군 불멸의 신화를 썼다. 78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대신 진영을 지켰고, 그 해 8월말, 이순신 스스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 대전투였던 부산해전에는 직접 참전해 공로를 세우기도 했다. 이듬해인 1593년, 79세로 충청수사로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에도 참전했다.

정걸은 화살이 다 떨어져 위태로운 권율 부대에 화살을 공급해 행주대첩에 방점을 찍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충청수군을 이끌고 한강을 타고 용산까지 올라가 강변에 있는 2만 명의 일본군에게 포를 쏘아 서울 수복에도 기여했다. 1594년에는 80세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산도에서 머물며 이순신을 도왔다.

1595년 사직한 뒤, 1597년 83세에 병사했다. 평생 동안 최전선을 지키며 나라에 몸 바친 참 군인 정걸. 31살이나 어린, 까마득한 후배 이순신을 상관으로 모시며, 불멸의 이순신을 만든 아름다운 어른 정걸 장군. 그가 있어 이순신이 백전불태(白戰不殆)했을 것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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