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뉴시스

19904. 비슷한 시기에 미국을 방문하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조지 H.W. 부시 대통령과 5월 말 워싱턴에서 3각 접촉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가 국내 언론에 보도됐다.

한국·미국·소련 워싱턴서 3각 정상회담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한 언론사 특파원 기사를 읽던 당시 염돈재 대통령 북방정책 담당 비서관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체돼 있던 소련과의 수교교섭에서 돌파구를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
 
그는 곧 추진 지시가 내려오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것을 하려면 만만치 않겠구나는 부담감도 같이 느꼈다. 예상대로 며칠 후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한번 뚫어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소 수교사의 한 장을 차지했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한·소 정상회담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5공 때부터 북방정책 추진 준비
 
북방정책은 노태우정부의 대표적 외교정책이지만 실무적인 준비는 5공화국 때부터 착수됐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1986년 행정부에 미수교국인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지시에 따라 그해 11월 정부 내에 중소(中蘇)팀이 만들어져 운영됐기 때문이다.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헝가리와 가장 먼저 수교를 추진하는 시나리오는 이 중소팀의 구상이었다. 그러나 4·13 호헌조치와 6월 민주항쟁, 대선 등 정치적인 격변기가 계속되면서 중소팀은 개점휴업 상태로 있게 됐다. 그러다 1988년 노태우정부가 들어서고 북방 외교정책도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재미교포 인맥이 만든 크렘린 가는 길
 
북방외교 정책의 주요 목표는 소련이었다. 소련이 공산권의 맹주인 데다 국가적인 과제인 88올림픽의 안전한 개최를 위해서도 소련과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정부는 판단했다.
 
문제는 당시 소련 수뇌부와의 접촉 채널이 없다는 점이었다. 박철언 보좌관이 아시아태평양변호사회 등을 통해 백방으로 접촉선을 찾았지만 성과는 없었다. 심지어 소련이 입국 비자를 줄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유럽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일도 있었다.
 
미국에서 영사로 근무했던 염 비서관이 당시 하만경 교수를 떠올린 것은 이때쯤이었다.
그는 재미교포인 하 루이스앤클라크대 교수의 미국 내 인맥이 탄탄하다는 점이 생각나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연락했다. 그런데 하 교수의 답은 기대 이상이었다. “내가 소련 측과 연결해줄 수 있다는 게 하 교수의 말이었다.
 
그의 자신감은 트랙2(민간) 차원의 미·소 경제위원회 등에서 활동한 경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 그는 소련 과학아카데미 산하 미국·캐나다 연구소 게오르기 아르바토프 연구소장을 통해 정부 대표단의 방소를 추진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출발 3일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 소련총영사관에서 비자가 나왔다.
 
소련 외무차관보와 첫 회동
 
박철언팀은 덴마크를 거쳐 1988828일 모스크바로 들어갔다. 일행인 박 보좌관, 염 비서관, 하 교수 등 3명은 공항에서 소련 국책연구소인 동양학연구소 직원의 환영을 받았다.
 
입국 후 고려인인 게오르기 김 동양학연구소 부소장과 만찬, 아르바토프 연구소장과의 면담 등의 일정을 거치면서 사전 정지작업을 진행한 대표단은 98일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소련 외무성을 방문, 블라디미르 루킨 차관보와 면담했다.
 
루킨 차관보는 “88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소련이 꼭 참가해달라는 요지의 노 대통령의 친서를 받은 뒤 일주일 정도 후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극동지역에 가는데 좋은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차 방소소련, 수교 가능성 시사
 
88올림픽이 끝나고 한동안 소강상태였던 수교교섭은 1990년 다시 진행됐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초대 소련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을 계기로 정부 사절단이 그해 3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이다. 대표단에는 당시 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과 박철언 정무장관(89년 정무장관으로 임명) 등으로 구성됐다. 김 최고위원측과 박 장관 측은 같은 대표단으로 같이 소련을 찾았지만 현지에서는 서로 다른 라인을 갖고 소련 수뇌부와 접촉했다.
 
먼저 김 최고위원이 322일 오전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만나 수교 원칙을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같은 날 박 장관팀과 별도로 만난 브루텐스 공산당 국제부 수석부부장은 대통령이 김 최고위원과 수교합의를 했다고 하니 이제 우리는 세부 협의를 하자고 운을 뗀 박 장관의 말에 수교합의는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23일까지 진행된 이 협의에서 소련측은 확실한 입장은 안 밝히고 수교 가능성만 열어뒀다.
 
한 자리가 틀렸던 전화번호, 미 측에는 접촉사실 우회 통보
 
소련의 연락책과 접촉이 안되는 상태에서 19904월 언론에 한국·미국·소련 워싱턴서 3각 정상회담 가능성이라는 기사가 났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지시로 정상회담 개최는 발등의 불이 된 상황이었다.
 
염 비서관은 다급한 마음에 서울의 소련영사관으로 전화를 해 연락책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했다. 수교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한소 양국은 그해 23월에 서로 영사관을 개설한 상태였다.
 
소련영사관을 통해 확인해보니 소련 측에서 불러준 전화번호가 한 자리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염 전 차장은 우리를 시험하려고 일부러 그랬는지 실수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새로 확인한 번호로 연락하니 일본 주재 소련 기자인 두나예프 이바노비치라는 사람이 나왔다. 염 비서관이 그에게 브루텐스 부부장을 아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체르니아예프밖에 모른다는 답이 왔다. 아나톨리 체르니아예프 대통령 안보보좌관은 대외정책과 관련된 소련의 핵심 인사였다. 염 비서관은 소련과 우리의 교섭 상황을 미측에도 알릴 때가 됐다고 보고 우회적으로 미국 측에 통보했다. 미국측에 체르니아에프 안보보좌관이 실제 소련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갖고 있는지 문의하는 형식을 빌려 간접적으로 미국에 알렸다.
 
염 비서관은 그에게 한국은 우방인 미국의 등 너머로 소련과 관계개선을 할 수 없으며 소련도 미국의 승인없이 한국과 관계개선을 할 수 없다면서 양국 정상이 미국에서 만난다면 한국, 소련은 물론 미국에도 좋다고 강조했다.
 
두나예프는 그 길로 모스크바에 들어갔다가 5월 초 서울에 왔다. 염 비서관 주선으로 해외에 나가 있던 박 장관 대신 김종휘 외교안보보좌관이 그를 만나 미국이 아니면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귀국하는 길에 블라디보스토크 등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밝혔다.
 
두나예프가 돌아가고 소련에서 통보가 왔다. 염 비서관이 지정했던 채널이 아닌 주 모스크바 한국영사처 공로명 처장을 통해 김종휘 보좌관에게 먼저 전달됐다. 그동안 수교 교섭을 진행해온 염 비서관은 나중에 이 4줄짜리 전문을 확인했다.
 
한소 양국은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에서 수교문제에 대해 최종합의를 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양국은 8월 대표단 접촉 등의 추가협의를 한 뒤 수교원칙에 합의했다. 그리고 그해 9월 유엔총회에 참석한 양국 외무장관에 의해 한소 수교가 공식 발표됐다.
 
<윤광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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