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히 벤치를 지키던 한 선수에게 감독의 눈길이 향한다.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대타’의 찬스가 온 것이다. 방망이를 힘껏 움켜쥐고 타석에 들어선 그는 호쾌한 홈런을 터뜨려 감독의 신뢰에 보답한다. 그는 영웅이 된다.

‘녹색 다이아몬드’ 위에서 일어나는 일만은 아니다. 수많은 스타들이 명멸하는 사각의 브라운관. 그 속에도 보이지 않는 ‘벤치워머의 설움’이 있고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살려 ‘대타홈런’을 터뜨리는 짜릿한 신화가 있다.인기 드라마가 종영되면 일반적으로 드라마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된다.그중 흔하게 등장하는 것이 ‘원래는 누가 하기로 했는데 거절당해 이 사람이 하기로 했다’는 ‘대타’역.사실 ‘대타’는 야구에서 자주 쓰는 용어로 누군가를 대신해 어쩔 수 없이 나오는 선수를 말한다.따라서 드라마에서 ‘대타’로 나오는 연기자는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하지만 방송계에서 ‘대타’는 꼭 나쁘지만은 않다.드라마를 제대로 고르기만 하면 대박 스타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 실례로 지난해부터 이러한 사례는 눈에 띄게 늘고 있다.MBC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방송기자 이신영역을 맡은 명세빈은 1순위가 아니었다.

당시 한동안 방송을 떠나 복귀 작품을 고르던 한 여배우가 1순위였지만 자신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사해 여주인공역은 명세빈에게 돌아가고 이 드라마로 인해 그는 이미지 변신 성공과 인기도 다시 얻게 됐다.지난해 최고의 드라마로 평가받은 ‘파리의 연인’에서 한기주역을 소화한 박신양 역시 배용준과 이정재에 이은 3순위. 하지만 배용준과 이정재가 한기주역을 거절했고 결국 박신양에게까지 배역이 오면서 지난해 최고의 스타에 오르게 됐다.또 최근 남성드라마로 인기를 끌고 있는 KBS 사극 ‘해신’에서 ‘염장’역으로 눈길을 끌고 있는 송일국도 애초 캐스팅 됐던 한재석을 대신해 좋은 기회를 잡았다.특히 송일국은 ‘애정의 조건’에서 한가인과의 사랑 연기로 인기를 얻은 뒤 주연급으로 발탁된 케이스다.

지성이 지난 1월 3일 종영된 SBS 드라마 ‘마지막 춤을 나와함께’ 일정으로 중도하차하면서 한가인·송일국 커플 연기가 상대적으로 비중이 커졌던 것.이처럼 ‘대타’로 출연해 이목을 집중시키는 드라마는 올해에도 빛을 발하고 있다. 바로 지난 1월 5일 첫 방영한 MBC 드라마 ‘슬픈연가’가 그 주인공이다.극중 이건우역은 원래 송승헌이 하기로 됐지만 송승헌의 갑작스러운 군입대로 연정훈이 이를 대신하게 됐다.첫방송 시청률이 18.7%를 기록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한 이 드라마에서 연정훈은 지난해 11월 캐스팅이 결정된 후 과연 송승헌의 공백을 채울 수 있을까 많은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지만 막상 촬영에 들어가 보니 만족스럽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드라마 제작진의 한 PD는 “모든 드라마의 캐스팅이 일사천리로 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캐스팅 과정 중 ‘대타’ 연기자는 흔히 있는 일”이라며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맡은 역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대타’가 드라마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오락프로그램 작가와 섭외담당자들은 섭외가 펑크날 경우에 대비해 대타용 연예인 리스트를 만들어 두고 있다. 특히 개그맨 L은 대표적인 대타출연자라고 한다. L은 녹화 하루 이틀 전이나 심지어 녹화 당일에 콜을 해도 달려와 주는 고마운 인물이라고. 물론 자신도 대타인 것을 알고 있지만 군소리 없이 열심히 해주기 때문에 제작진 사이에서는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연예인으로 통하고 있다. 여자개그맨 K 또한 대타전문 연예인이다. K는 출연분량이나 비중에 상관없이 몸을 사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줘 스태프들에게 인심을 얻고 있다. 여자연예인으로서 꺼릴 수도 있는 망가지는 연기도 K에게는 모두 OK. 때문에 동료연예인들까지 K와 함께 출연하는 것을 반긴다고 한다. 한 프로그램 PD는 K가 알아서 망가져주기 때문에 함께 출연하는 연예인들 입장에서는 부담 없고 편한 인물로 통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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