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하게 발품팔이를 하고 난 후에야 겨우 절반이 성공. 또 다시 장소 관계자를 설득하고 애걸하고 혹은 이런 저런 조건을 내걸고 온갖 방법을 써서 허락을 받아내야만 겨우 한숨 돌릴 수 있는 것. 바로 영화 촬영지 헌팅이다.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었어요”라는 말은 그럴싸한 풍광이 나오는 영화를 연출한 감독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과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거나 주요 촬영지가 특수한 시설물이 설치된 곳일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년 2월 개봉 예정으로 현재 후반 작업중인 화제작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은 “촬영장소를 찾는데 1년 가까이 걸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 감독은 “한국전쟁 당시의 산들이 대부분 민둥산이었는데, 그에 걸맞는 산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산불이 났다는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눈에 들어오는 곳이 없었다”고 후일담을 전한다. 이렇게 장소 헌팅에 애를 태운 <태극기 휘날리며>는 결국 합천, 경주, 인제, 양구, 순천, 아산, 전주 등을 두루 돌며 전국 올로케로 촬영을 했다. 한국전쟁 속에서 전쟁영웅이 되어 가는 형(장동건)과 변해 가는 형을 증오하는 동생(원빈)의 모습을 통해 전쟁의 허무함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어렵사리 촬영 장소를 결정지은 것 외에도 20억원 규모의 평양시가지 세트장 등을 제작한 후에야 카메라에 담길 그림을 완성했다.

촬영장소 협조를 받지 못해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박솔미 김성재 주연의 <바람의 전설>(감독 박정우)은 제비로 오해를 받아 교도소에 수감된 풍식(이성재)과 연화(박솔미)가 교도소 정원에서 춤을 추는 것이 골자인 마지막 장면의 시나리오를 급하게 수정했다. 이유는 교도소 측의 촬영 협조를 얻지 못했기 때문. 올 3월 개봉했던 <대한민국 헌법 제1조>도 국회의원이 된 윤락녀 고은비(예지원)가 국회에 등원하는 신이었으나 결국 국회가 촬영을 거부, ‘월담’ 신으로 시나리오 일부를 수정했다.

‘퍽치기’ 범죄자들을 쫓는 형사들의 활약을 그린 <와일드 카드>는 영화 속 범인의 검거 장소가 될 경마공원 촬영과 관련, 마사회 측과 한바탕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마사회 측은 “범인 검거 장소로 활용되는 것은 대외 이미지 훼손 염려가 있다”며 촬영을 거부했다. 결국 제작진은 상봉동 경륜장을 경마장으로 꾸민 뒤 촬영하는 고육지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살인의 추억>은 실제 사건이 벌어진 경기도 화성을 촬영장소로 잡지 못해 부안-정읍- 장성-해남 등을 선택해야 했고, <공동경비구역 JSA>는 군부의 협조를 얻지 못해 부득이 판문점 세트장을 만드는데 거액을 투자해야 했다. <올드보이>의 경우, 화려한 팬트하우스와 주인공이 15년이나 감금돼 있었던 골방 등은 일찌감치 마련됐으나 마지막까지 말썽을 부렸던 곳은 주인공 대수(최민식)의 학창시절을 그려낼 학교였다. 나무와 계단이 많아야 하고 가톨릭 분위기가 나는 오래된 건물을 원했던 박찬욱 감독의 요청에 따라 스태프들은 5개월 동안 전국의 학교를 찾아 다녀야 했다.

결국 촬영을 며칠 앞두고서야 적합한 장소를 찾았다. 경남 진주에 있는 송계중·고등학교가 바로 그곳. 공포영화인 <여고괴담3-여우계단>도 주요 무대가 됐던 학교 섭외로 애를 태운 케이스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자살, 죽음 등으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이 영화의 촬영을 환영하는 학교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천재지변으로 촬영 장소가 갑작스럽게 바뀌는 경우도 있다. 최근 선보인 영화 <…ing>은 주인공 김래원과 임수정의 바닷속 유영 장면은 극중 배경인 하와이가 아닌 사이판이었다. 당시, 태풍으로 하와이 바닷속이 탁해져 촬영지를 사이판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한편, 영화 제작 스태프들이 의견을 주고받는 필름메이커스커뮤니티(www.filmmakers.co.k r)에는 촬영 장소 섭외와 관련, SOS를 타전하는 글들이 줄을 잇고 있다.

“한편의 영화를 만드는 일은 좋은 장소를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인 것 같다. 그만큼 힘든 일이다”, “도심의 높다란 건물들로 가득 찬 빌딩위 옥탑방을 찾는데, 벌써 일주일째 돌아다니고 있다. 아직 수확이 없다” 등의 글을 보면 제작진의 고초를 그대로 알 수 있다. 또, 이 사이트를 통해 이색 촬영지를 물색하는 제작진들의 다급한 사연도 접할 수 있다. “서울에 바퀴벌레를 파는 곳은 어디인가요?”, “시체안치소 장면은 어디서 찍나요?”, “지저분한 화장실 찾습니다. 요즘 화장실 청소를 깨끗이 하는 곳이 많아서 찾기가 힘드네요”, “커다란 폭포 모형이 있는 대중목욕탕을 찾고 있습니다”, “날아가는 비행기의 바퀴를 찍을 수 있는 지역을 아시면 좀” 등이다. 한편 이 사이트의 운영자는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맙시다”라는 공지글을 통해 ‘로케이션 뱅크’나 ‘로케이션 매니저’ 등이 없는 현실에서 비롯된 소모적이고 비효율적인 작업을 지적하며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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