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이 선생을 만나니 기쁩니다.” 

2000726일 태국 방콕의 쉐라톤 호텔. 역사적인 첫 남북 외교장관회담에서 당시 백남순 북한 외무상(2007년 사망)이 이정빈(77)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건넨 인사말이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정부 간 안전보장 협의체인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취재차 몰려든 전 세계 취재진의 관심은 분단 이후 처음 열린 남북 외교장관회담에 쏠려 있었다. 회담 개최 자체로도 언론의 관심을 크게 불러 모았던 이 회담은 그해 10월 유엔에서 채택된 남북 첫 유엔공동결의안의 산파역할을 했다.
 
2000년 첫 남북 외교장관회담서 제의
 
화기애애하게 시작된 회담 = 이 장관이 오후 530분께 호텔 2층 리버사이드 3룸에 먼저 도착한 뒤 백 외무상도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웃음을 띤 두 외교장관은 수백 명의 취재진 앞에서 악수를 나눈 뒤 회담장으로 향했다.
 
한 달여 전인 613~15일 김대중 대통령(2009년 서거)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2011년 사망) 간의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린 터라 첫 외교장관 회담은 좋은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대남 전문가인 백 외무상은 회담 당일 오전 남측 기자들을 만나 동족끼리 처음 만나는 자리인 만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밝혀 분위기를 더욱 북돋웠다.
출국에 앞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백 외무상을 만나면 유연하게 대처하라는 주문을 받은 이 장관도 이 회담을 국제무대에서 남북의 대립 구도를 화해 구도로 전환하는 계기로 삼겠다는 의욕에 넘쳐 있었다.
 
백 외무상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인사에 이 장관은 지난달 두 정상이 회담한 덕분에 여기서 두 외무장관이 회담하게 된 것 같습니다라며 “(6·15) 공동선언의 정신에 따라 화해·협력을 위해 좋은 이야기를 나눕시다라고 화답했다.
 
이에 백 외무상도 두 정상이 만나 진지하게 의논하고 역사적인 공동선언을 했습니다세계 이목도 집중됐고 북남 사이의 교류와 협조도 눈에 띄게 잘 되는 것 같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소모적인 남북 표 대결 = ·소 냉전이 한창일 때는 이른바 남한 결의안북한 결의안에 대해 지지표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는 것이 양쪽 외교관들의 가장 큰 임무였다.
 
1970년대 초 유엔대표부에서 근무했던 이 전 장관은 유엔 회원국들을 쫓아다니면서 우리를 지지해달라고 할 때 말할 수 없는 한()이 맺혔다면서 국가적으로 이렇게까지 구걸외교만 해서 되겠느냐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대결 외교는 진정 국면에 들어섰지만, 1991년 유엔 동시 가입 이후에도 양쪽 외교관들은 서로 냉랭했고 말을 주고받는 일도 없었다.
 
남북 분단외교의 현장을 몸소 겪었던 이 장관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태도가 유연하지 못한 것은 외교적으로 고립된 탓이 크다는 생각에 20001월 취임하자마자 북한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애를 썼다.
 
때마침 북한도 19999월 제54차 유엔총회를 계기로 20여개국과 외무장관 회담을 진행하고 이듬해에는 호주, 이탈리아 등 주요국과 관계 정상화에 나서는 등 전방위 외교에 나서기 시작한 터였다. 북한이 20005ARF 가입 의사를 밝히고 두 달 뒤 열리는 ARF 외무장관 회의에도 참석할 것이 확실시되면서 우리 외교부 안팎에서는 첫 남북 장관 간 개별 회동 가능성이 조심스레 점쳐지기 시작했다. 6월 남북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외교장관회담 개최로 이어질 수 있는 분위기도 자연스레 조성됐다.
▲ 뉴시스
남북 외교장관회담 순조롭게 성사 = 2000630일 하와이에서 열린 한··3자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회의에서 3국은 ARF에서 북한과 개별 외교장관 회동을 모두 추진키로 의견을 모았다. 이 장관은 TCOG 직후인 7월 초 적십자 채널을 통해 북한에 ARF 기간에 별도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뜻을 전했다.
 
북측이 방콕에서 회담하자는 답을 보내오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북한으로서도 다자외교의 첫 데뷔 무대에서 남한과의 회담에 응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전방위 외교 행보를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장소, 의제 등을 조율하는 실무 접촉은 방콕에 있는 남북 대사관이 맡았다. 회담까지 20일 남짓밖에 남지 않은 터라 협의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의제도 중요했지만 우리 정부는 남북이 먼저 만나야 의미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남북 회담이 북미, 북일회담보다 먼저 열리도록 신경을 썼다. 남북 외교책임자가 테이블에 의제를 올려놓고 하는 공식 회담을 하기는 당시가 처음이었다.
 
1991930일 유엔 동시가입을 앞두고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당시 이상옥 외무장관과 김영남 외교부장이 비공식적으로 7분 남짓 접촉한 적이 있었을 뿐이다.
 
유엔 남북 공동결의안 전격 제의며칠 뒤 화답 = 이 장관과 백 외무상은 취재진이 자리를 뜬 이후 당시 우리 외교부의 장재룡 차관보, 최영진 외교정책실장(전 주미대사), 북한 외무성의 리용호 참사, 마철수 아시아태평양 국장 등 각각 5명이 배석한 가운데 약 40분간 회담을 진행했다. 이 장관은 회담에서 오랫동안 마음먹었던 카드를 꺼냈다. 한반도 통일을 국제사회가 공개적으로 지지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남북이 함께 만들어 유엔총회에서 통과시키자고 백 외무상에게 제안한 것이다.
 
이 장관의 설명을 곰곰이 듣던 백 외무상은 좋은 생각 같지만 나 혼자 결정을 못 하겠소라며 돌아가서 통일사업 부서와 협의를 해야 답을 줄 수 있다고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다.
두 사람은 회담 직후 남북간 화해와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대외 관계와 국제무대에서도 상호 협조해 나가기로 했다는 내용의 공동발표문을 채택했다.
 
유엔결의안 부분은 백 외무상의 요청으로 발표문에서 일단 빠졌기 때문에 이 장관의 전격적인 제안은 당시 비밀에 부쳐졌다.
 
ARF 회담이 끝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곧바로 평양에서 답이 왔다. 발신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 백남순’, 수신처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장관 이정빈 귀하였다.
 
백 외무상은 우리측에 보내온 이 문서에서 유관부서와 의견을 나눠봤더니 좋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사항은 유엔 대표부를 통해 협의하도록 합시다라고 답변했다.
 
이 문서가 북한이 남한 각료급에 공식 직함을 사용해 보낸 최초의 문서라고 이 전 장관은 설명했다.
 
이 전 장관의 전격적인 제의를 시작으로 남북 유엔대표부의 협의를 거쳐 탄생한 한반도 평화와 안전, 통일에 대한 결의(55/11)는 그해 1031일 제55차 유엔 총회에서 채택됐다. 189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분단외교의 상징인 남북한이 처음으로 유엔 무대에 올린 합작품이라는 점에서 결의 55/11은 더욱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윤광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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