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 대한민국 외무부가 신년 업무보고에서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가입 3년을 갓 넘긴 유엔(UN)에서 19961997년 임기의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에 입후보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김영삼(金泳三) 당시 대통령(2015년 서거)이 국정의 제1목표로 내세운 세계화’(世界化)와 맥을 같이 하는 목표였다. 외교가에서는 안보리 진출이야말로 한국이 국제사회의 주변국에서 중심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공감대가 이미 형성돼 있었다. 5개 상임이사국(P-5)10개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된 안보리는 국제 현안에 관한 강제적 권한을 가진 유엔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구로, 안보리 진출은 곧 우리가 국제사회의 실질적 의사결정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특히 비상임이사국이 되면 안보리의 핵심인 비공개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동안은 비공개회의의 내용을 귀동냥으로만 파악해야 했던 터라 정보의 수준이 안보리 회원국들에 비해 질적양적으로 현저히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당시 유엔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비동맹회의(NAMNon-Aligned Movement)와의 관계에서 북한에 한 발 뒤져 있는 입장이었다. 한국은 북한과 달리 NAM의 정회원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NAM이 다루는 정치적인 사안에서 한반도 관련 조항은 상당 부분 북한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리되곤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안보리에 진입하면 안보리 회원국인 비동맹 국가들과 북한 이상으로 끈끈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이는 정부 수립 이후 유엔 무대에서 지루하게 계속됐던 북한과의 대결 외교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게 정부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안보리 진출에는 스리랑카라는 장애물이 있었다. 스리랑카는 1960년대에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을 한 번 역임했지만 서남아 국가를 비롯한 비동맹권의 지지를 바탕으로 국제 외교무대에서 관록(官祿)을 인정받고 있었다.
 
게다가 스리랑카에는 유엔 내에서 탄탄한 인맥을 자랑하는 인물이 있었다. 훗날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까지 거론된 자얀타 다나팔라 유엔 군축담당 사무차장이었다. 특히 당시 안보리에서는 NPT(핵확산금지조약) 연장 문제가핫이슈였던 터라 군축 전문가인 다나팔라 사무차장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스리랑카와 아주(亞洲) 그룹 내에서 경합을 벌이게 된다면 한국의 안보리 진출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되려면 총회에서 참석 국가 3분의 2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스리랑카와 표 대결을 벌이기보다는 후보 단일화를 이루는 것이 최선이었다.
실제로 2006년 중남미 그룹에서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던 베네수엘라와 과테말라는 47차례나 표 대결을 벌인 끝에 중남미 국가들의 중재로 파나마에게 비상임이사국 자리를 양보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스리랑카와의 교통정리가 우리 외교의 선결 과제로 떠올랐다.
정부가 택한 스리랑카에 대한 경제원조를 통해 품위 있는 사퇴(decent withdraw)’를 이끌어내는 전략이었다. 한국에 후보 자리를 양보하면 한국 기업의 투자유치에 보다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는 점도 적극적으로 부각시켰다. 때마침 스리랑카의 내부 분위기에서도 약간씩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19949월 정권 교체 이후 타밀 반군에 의한 내전 위기를 해결하고 경제를 재건하는 것이 정책 우선 과제로 부상하면서 안보리 진출은 뒤로 밀려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스리랑카는 표 대결까지 가더라도 한국을 이기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결국 19955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스리랑카가 후보에서 사퇴하자 48개국으로 구성된 아주그룹도 한국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우리나라의 안보리 진출에 청신호가 켜진 것이었다.
 
유엔 가입 4년 만에 안보리 진출한국 외교의 쾌거
 
이때 작은 악재가 불거졌다. 아주그룹 회의 분위기가 한국의 단독 후보 추천을 결정하는 쪽으로 기울자 북한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선 것이었다. 당시 박길연(73) 유엔 주재 북한 대사는 발언권을 신청해 안보리 이사국 선거는 11월에 있는데 뭐 그리 서두르느냐. 우리도 안보리에 출마할지 모른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북한의 이 같은 도발은 별다른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한국은 아주그룹 국가들의 합의(consensus) 하에 단독 후보로 추대됐다. 당시 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던 박수길 전() 주유엔 대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주그룹 의장을 맡고 있던 체링 부탄 대사의 역할이 컸다고 회고했다. 체링 대사가 합의(consensus)’만장일치(unanimity)’의 미묘한 차이를 이용해 일부 국가의 문제 제기는 있었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아 합의가 이뤄졌다는 논리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체링 대사가 평소 박 전 대사와 쌓아왔던 각별한 친분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당시 유엔 내에서 3세계 중심적(third world oriented)’외교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했던 박 전 대사는 체링 대사와 수시로 식사를 함께하며 각종 사안에 대해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의견을 나누는 막역한 사이였다. 비동맹 국가들이 한국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한 것 역시 주목할 만한 대목이었다. 북한이 NAM 회원국들을 충동해 한국의 안보리 진출을 저지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전 대사는 이를 두고 지난 20123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한국 정부가 비동맹 국가들과의 관계 발전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기울여왔던 노력이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 전 대사 본인 역시 비동맹 국가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적지 않은 공()을 들였다. 박 전 대사는 유엔 본부에서 비동맹 국가들의 회의가 열릴 때면 근처 로비를 몇 시간씩이고 서성이곤 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비동맹국 외교관들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서였다. 때로는 해외에서 열리는 비동맹국 회의장에까지 불원천리(不遠千里) 하고 달려가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는 데 최선을 다했다. 아주그룹의 후보 단일화로 우리나라의 안보리 진출은 사실상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지지를 약속하고서도 유엔총회 투표에서는 찬성표를 던지지 않는 나라가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전방위적인 표밭 다지기전략을 세우고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세계 각국 정상과의 회담을 통해 한국의 안보리 진출에 대한 지지를 재차 당부했고, 당시 공로명(84) 외무장관도 남미 순방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했다. 유엔에 공관이 없는 약소국에게는 뉴욕행 여비까지 제공해가며 투표 참여를 독려했다.
 
1995118,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다. 한국은 이날 유엔총회에서 실시된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선출 투표에서 투표 참가국 177개국 가운데 유효투표의 3분의 2118표를 넘는 156표를 얻어 안보리 진출을 확정지었다. 유엔 가입 4년 만에 이뤄낸 한국 외교의 쾌거였다.
 
<윤광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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