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시스
“형사재판권뿐 아니라 내자호텔 반환·‘KOAX12’도 맞물려 

19888월 어느날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의 당시 외무부로 한 미국인 남성이 다급히 찾아왔다. 유광석(65) 당시 외무부 미주국 안보과장과의 면담을 요구한 이 남성은 캐럴 해지스 주한미8군 부사령관 특별보좌관이었다. 해지스 특보는 유 과장에게 전날 발행된 석간신문의 기사 하나를 가리키며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따져 물었다.
 
·미행정협정 개정
 
한국 정부가 한·미행정협정 개정(改正)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외무부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한 2단짜리 짤막한 기사였다.
 
유 과장은 ·미가 언제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느냐고 항의하는 해지스 특보에게 미국이 개정에 동의했다고 어디에 적혀 있는가. 우리 정부가 추진하겠다고 돼 있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 과장은 낯붉히는 언쟁이 끝난 뒤 한·미행정협정, 즉 미군에 대한 우리의 재판관할권과 출입국 관리, 시설과 구역, 형사재판권, 노무 등을 규정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논의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1966년 체결 이후 끊임없이 불평등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한·SOFA의 첫 개정 협상을 위한 작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내자호텔 반환과
‘KOAX 12’ 사건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주한미국대사관 2등 서기관이 국회에서 우리 야당 대표를 만난다고 알려진 시절이 있었다.
 
미국에 대한 대중의 인식 변화가 감지된 것은 1980년대부터였다. 미국이 19805월 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을 묵인했다는 의혹이 재야운동권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주한미군 범죄도 반미(反美) 정서를 자극했다. ·SOFA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었다.
 
특히 범죄(犯罪)를 저지른 주한미군에 대해 형사재판권의 1차 관할권을 행사하겠다고 우리가 사건별로 통보치 않으면 자동으로 미국에 관할권이 넘어가는 형사재판권 자동포기조항은 불평등의 상징으로 널리 인식됐다. 이 조항은 첫 SOFA 개정협상이 1991년 마무리될 때 결국 삭제된다. 첫 개정 협상과 맞물린 또 다른 2개 주요 사안은 주한미군 숙소였던 내자호텔 반환과 주한미군교역처(KOAX)의 한국인 직원 해고 사건이었다.
 
서울 종로 사직터널에서 광화문 중앙청으로 이어지는 사직로에 위치한 내자호텔은 1980년대 교통 체증의 주범으로 악명높았다. 도로 중앙에 튀어나온 이 호텔 때문에 병목현상이 심했기 때문이다. 유광석 안보과장은 19871월 과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해묵은 이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유 전 대사는 20132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인사들을 볼 때마다 교통혼잡 시간에 내자호텔 주변을 차 타고 가 보라. 길 막힐 때마다 호텔을 보며 욕하지 않겠느냐. 반미감정에 기름을 붓는 일이라고 설득했다고 말했다.
 
내자호텔은 본래 1935년 일본 미쿠니 석탄회사가 직원용으로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였다. 한국전에는 각국 종군기자 숙소로, 1955년부터는 유엔 한국재건기구 사무실로도 사용됐던 이곳은 19908월 철거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내자호텔 반환이 시설과 구역 문제였다면 주한미군교역처(KOAX)에서 해고된 노동자 12명의 복직 투쟁인 ‘KOAX 12’ 사건은 노무 문제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1981KOAX 용산매점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 12명이 물품을 빼돌린 혐의로 집단 해고됐으나 우리 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정부는 복직을 요구했으나 미군은 재취업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한·SOFA 시행을 위한 협의기관인 SOFA합동위 산하 노무분과위에서 올라오는 건의를 모두 보류하는 식의 강수를 두면서 미국과 기 싸움을 벌였다.
결국 한·SOFA 개정 협상으로 미국의 양보를 받아내 복직 희망자 8명이 다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반미분자들과 일 못해
압력 뚫고 개정 관철
 
정부는 내자호텔 반환과 ‘KOAX 12’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전후해 1987년 후반부터 미국 측에 본격적으로 한·SOFA 문제점들을 하나둘씩 제기하기 시작했다.
 
유 과장은 해지스 특보의 방문 직후, 신두병(81) 당시 미주국장과의 논의를 거쳐 한·SOFA에 대한 우리 정부의 견해를 정리한 외교문서를 딕 크리스텐슨 주한미대사관 1등 서기관과 해지스 특보에게 1부씩 전달했다. 가장 비공식적인 발언문(position paper) 형식이었지만 엄연한 외교문서였다. 22년째 계속된 협정을 손대는 것은 만만치 않았고 압력도 있었다.
 
특히 미국은 다른 나라와 그때까지 맺은 50여개 SOFA를 개정한 전례가 없는 상태에서 한국과 개정 전례가 생기면 감당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유독 미군의 거부 반응이 심했다.
 
유 전 대사는 인터뷰에서 해지스 특보가 인맥을 동원해 총리에게 외무부 미국 담당 국장과 과장이 반미분자들이라 같이 일을 못 하겠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제임스 릴리 주한미국대사도 외무장관실로 찾아와 미국은 어떤 나라와도 SOFA를 개정한 전례가 없는데 왜 제일 가까운 우방인 한국이 이렇게 괴롭히느냐고 불만을 내비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한미8군측으로부터 ·SOFA 개정(revise)까지는 어렵지만 재검토(review)를 해보자는 전향적인 제안이 도착했다.
 
여기에는 훗날 주한미부대사까지 역임한 크리스텐슨 서기관의 도움이 컸다고 유 전 대사는 회고했다. 크리스텐슨 서기관은 어느 날 갑자기 유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이 생각하는 한·SOFA의 문제점을 다시 상세히 설명해달라고 청했다. 이미 수없이 주고받았던 이야기였지만 1시간도 훌쩍 넘긴 그날 통화에서는 평소보다 구체적인 설명과 끊임없는 질문이 오갔다.
 
유 전 대사는 수년이 지나 일본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때 통화 직후 워싱턴으로 출장갔다. 당시 주한미대사관과 주한미군, 국방부, 국무부 관계자를 불러모아 한·SOFA를 논의하는 합동회의가 소집됐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다고 말했다. 격론(激論)이 이어진 회의에서는 처음에 한·SOFA 개정 시 다른 나라들의 개정 움직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는 우려가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크리스텐슨 서기관이 홀로 한미동맹을 건전히 유지하려면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유 과장에게서 들은 다양한 논리들을 설득력 있게 전한 결과 18의 논쟁에서 이겼다고 했다.
 
이후 양국은 미군의 제안에 따라 한·SOFA 재검토위원회를 구성했고 분과위별로 실무차원에서 협정을 재검토하는 작업을 수개월간 진행했다.
 
<윤광제 작가>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