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도 벗고 몸도 벗고 그렇게 발가벗은 나에게 더 벗어보라고 또 다른 걸 보여달라고 합니다. 한번 벗었으니 두 번은 못 벗느냐고 하는 자기들은 두꺼운 외투에 장갑까지 끼고 있으면서 말이죠. 그래서 내 마음이 얼었던 거예요.” 1999년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이하 나도 때론…)>는 성체험 고백서를 내면서 세상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던 서갑숙은 그 얼었던 마음을 녹이는데 4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는 최근 두 번째 에세이 <추파>를 내놓았다. 이번 책에는 <나도 때론…> 이후의 고단했던 삶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양지로 나와야 할 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힘겹고 답답했던 심정만 표현한 것은 아니다. 향기로운 사람이야기도 있고 그가 항상 고민하는 `사랑에 대해서도 쓰고 있다. 여행에서 만난 새로운 남자, 그가 태어난 것보다 13년이나 뒤에 태어난 독일인 K와의 ‘달콤한 러브스토리’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13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아담한 카페에서 세상으로 걸어나올 채비를 마친 그를 만났다.

-상처 입은 마음은, 이제 툭툭 털어버린 것인가.
▲내가 느낀 것은 해일이었다. 산만한 것이 덮쳐오는데 나같이 작은 사람은 금방이라도 산산조각 나고 없어질 것 같더라. 그후 남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의도를 캐내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곁에 있는 좋은 사람들, 특히 3년 전 내게로 온 딸들 때문에 다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람으로 돌아갔다. 일상의 행복을 알게 되니 꽁꽁 얼었던 마음이 녹더라. 상처는 치유됐고 나는 튼튼해졌다.(<추파>에는 그의 사생활을 더 세밀하게 파헤치려 했던 매스컴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다. 인터뷰를 위해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 그 내용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조금은 차가운 만남이 되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괜한 기우였다. 그쪽에서 먼저 마음을 연다. 기자도 마음을 열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주변 인물에 대한 묘사가 조금은 조심스럽다는 것을 느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지극히 사적인 얘기는 삼갔다. 첫 번째 책으로 많은 이들을 떠나보냈다. <나도 때론…>에 등장했던 한 친구는 아직도 나를 보려하지 않는다. 더 이상 사람을 잃기는 싫다.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인 생활이 남에게 알려진다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오현경에게 보내는 편지 중)’라는 대목을 발견했다. 사생활을 거침없이 밝혀온 과거의 행동과는 상반되는 말이 아닌가.
▲내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은 다 보여주었는데, 내가 원하지 않는 것까지 보이라고 하는 게 유쾌하지 않다는 뜻이다. 나에게 더 보여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털어놓을 수 있다면, 나는 그들 앞에서 더 벗어 보일 용의가 있다. (이제 인터뷰의 주제를 ‘사랑’으로 돌리련다. 그는 첫 번째 책을 냈을 때 “서갑숙씨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인가”를 물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당신의 남자는 몇 명인가?”, “당신과 사랑을 나누었던 M은 누구인가?”라는 질문만 쏟아졌다. 정작 말하고 싶었던 것에 대해 말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사랑’에 대한 정의, 참 어렵다. 당신은 사랑을 뭐라 생각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이란 뭐지?’라는 또 다른 물음만 돌아오는 게 사실이다. 철학자들이 사랑에 대해 논한 것을 찾아보기도 했고 내 경험을 바탕으로 완전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우치려는 노력도 해봤다. 사랑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

-그런 고민을 통해 생각이 바뀌던가.
▲사랑은 받고만 싶었다. 주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주는 사랑 쪽으로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 얼마나 기쁘겠는가. 사랑을 줄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의 감정을 표현할 때 적극적인가.
▲한 마디로 도발을 빨리 하는 거다(웃음). 본능적으로 확 끌리면 그것 자체로 사랑을 할 수 있다.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했던 독일인 K와는 계속 연락하나.
▲어제, 내 책이 나왔다고 메일을 보냈는데, 아직 메일 확인은 안 했더라. 이번 책 중 K에 관해 쓴 부분을 번역해서 보내줄 예정이다. 그에게는 지금 예쁜 여자친구가 있다.

-K에 대한 미련은.
▲(그를 알게 된지)벌써 4년이나 흘렀다. K는 내 마음속에 지금도 있다. 지금의 여자친구와 그만 만나게 돼서 나에게 연락을 해오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해본다.(웃음) (”고마워.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도록 네가 있어줘서. 만약 내가 다시 책을 쓴다면 그 책에 너에 관한 얘기를 써도 괜찮아?”“…괜찮아. 다만 책이 나온 후 내가 그 내용을 알 수 있도록 번역해서 내게 보여줘.”<추파>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다. 이렇게 해서 K의 스토리가 이 책에 담기게 된 것이다. 여행중 지중해 바다 한 가운데서 만난 서갑숙과 K는 지난 2001년 여름 이별여행을 했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서 빨리 내 곁에 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미래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책 속에 있다. 지금은 사랑하는 이성이 곁에 없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사실, 그 부분을 쓸 때에는 마음이 조급했었다. ‘어떻게 사람이 마흔살 이상을 살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사랑이 빨리 오기를 기원했고 그 심정을 그대로 쓴 것이다.

-지금은 조급하지 않은가.
▲그런데 막상 40살을 넘기고 나니 전에 몰랐던 다른 삶이 있는 거다. 50살이 돼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나이같은 것은 상관없이 사랑을 기다린다.

-이번 책에도 ‘성감을 위한 근육운동은 범죄?’, ‘한국 여자들의 마스터베이션’ 등 음지에 머물러 있는 성의식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
▲성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정말 성에 대해 무지하다. 나 역시 그랬다. 성을 무조건 쉬쉬하고 금기시했던 우리내 교육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섹스는 사랑을 전제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건강까지 배려해가며 하는 것이라고 알려주는 게 제대로 된 성교육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계획은.
▲어떤 작품이건 내가 재미있게 일할 수 있다면 가리지 않고 하겠다. 단지 나의 첫 번째 책과 연관시킨 역할이라면 절대 사양이다. 내년쯤 연극 두 편을 선보이기 위해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글을 마치 공장처럼 써요. 이것 저것 정해놓고 틀을 짜놓고 쓰는 게 아니라 그때 그때 생각을 줄줄 풀어내는데, 이번 책에는 그 순서도 바꾸지 않고 실렸더라구요.” 그의 3년지기 친구인 <추파>를 펴낸 디어북의 편집장 연정태씨는 서갑숙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주고자 가감없이 글을 실었다고 한다. 책의 분량에 맞추기 위해 그의 글 일부가 잘려나가지도 않았다. 서갑숙, 그의 생각과 마음을 ‘오차’ 없이 느끼기에는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가 좀 더 괜찮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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