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의 멘토, 류성룡의
- 충무공 악비를 소개한 장군의 멘토

<류성룡 초상화>
어떤 사람이든 누군가에게 배우고 살아간다. 가르침을 주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건 스승이다. 요즘은 스승 대신 흔히 멘토라고 하기도 하지만, 스승이란 말이 훨씬 아름답고 고귀하다. 이순신에게 가장 큰 스승 멘토는 자기 자신인 듯하다. 두 번째는 그가 하늘(天只)라고 불렀던 어머니, 세 번째는 류성룡일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관점에 따라 논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류성룡 만큼은 그 누구라도 이견이 없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다. 일기 기록을 보면, 이순신도 류성룡을 인정했고, 존중했다. 이순신 관련된 기록이나 류성룡이 남긴 기록도 마찬가지다.

▲ 1592년 3월 5일. 맑았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군관 등은 훈련용 화살을 쏘았다. 해 질 무렵 서울에 올라갔던 진무가 돌아왔다. 좌의정이 편지와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읽어보니, 수전(水戰)과 육전(陸戰), 화공(火攻) 등에 관한 일을 하나하나 논의했다. 진실로 세상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이론이었다.

당시 좌의정은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다. 류성룡이 처음 등장한 일기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동네 선후배 사이다. 류성룡은 25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승승장구했다. 47세에 대제학, 48세에 대사헌·병조판서, 49세에 우의정 겸 이조판서, 좌의정 겸 이조판서가 되었다. 전쟁기간 중에는 도체찰사, 영의정을 역임했다. 기이하게도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에 류성룡도 파직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임진왜란의 전후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징비록》을 저술해 후세에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순신과 류성룡이 처음 만난 시기는 확실치 않다. 이순신 가족이 언제까지 서울에 살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류성룡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류성룡이 13세 때 서울 동학(東學)을 다닌 이후 18세에 할아버지의 상을 치를 때까지 주로 서울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아 그 시기에 이순신과 만난 듯하다. 이순신 기준으로는 10세부터 15세까지다. 그들은 지금의 남산에서 충무로 일대에 살며 만난 듯하다. 그래서인지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자신의 친가가 있던 건천동(현재 서울 중구 인현동 일대)의 인물로 “류성룡, 허봉(허균의 형), 이순신, 원균”을 꼽았다.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도 유희춘, 퇴계 이황, 허엽(허균의 아버지)이 건천동에 산 기록이 나온다. 또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이 건천동 유희춘의 집을 왕래하는 모습도 나온다. 유희춘의 기록을 보면, 허균의 주장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은 건천동, 류성룡은 정확히는 묵사동(지금의 묵정동)에 살았다. 허균 시대에는 묵사동도 크게는 건천동에 포함된 듯하다. 이순신과 류성룡의 인맥관계도 아주 밀접하다. 류성룡은 이순신의 작은형 이요신과 친구였고, 이순신의 6촌 형인 이여옥과도 친한 관계였다. 이순신의 사위인 홍비의 아버지, 홍가신(1541~1615)도 류성룡과 함께 관악산에서 과거공부를 했었다.

《선조실록》에는 류성룡이 자신과 이순신의 관계, 어린 이순신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류성룡은 선조에게 이순신에 대해 “한동네 사람이라 어릴 때부터 알고 있는데,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장(大將)이 되기를 꿈꾸었습니다”라고 했다. 류성룡은 청소년 시절에 만난 이순신의 성격과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정읍현감, 전라좌수사에 적극 천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류성룡은 스스로도 군사 분야에서도 최고의 전략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순신에게 군사지식을 전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이순신의 소양을 키우는 데 스승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날 일기 내용처럼 이순신이 읽고 감탄했던 《증손전수방략》도 류성룡이 편찬한 전략전술서다. 그러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날짜만 쓴 《난중일기》 1593년 9월 15일 일기 다음 장에는 이순신의 메모가 있다.

▲ 군대의 날카로운 기세가 이르는 곳마다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았다. 흉악한 무리들의 남은 넋들은 달아나 숨을 틈이 없었다(兵鋒以至, 勢如風雨, 兇孼餘魂, 逃遁不暇).
▲ 한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바다가 함께 기뻐하네(尺劍誓天 山河動色).
▲ 출전하여 만 번 죽을 일을 당했어도, 한 번도 살려고 계획하지 않았다. 분노하고 분노하는 마음 끝이 없다(出萬死不顧一生之計).
▲ 사직(社稷)의 위엄 있는 신령에 힘입어 작고 보잘 것 없는 공로를 세웠는데도, 총애와 영광이 넘치고 넘쳐 분수를 뛰어 넘었다(仗社稷威靈, 粗立薄效, 寵榮超, 有踰涯分).
▲ 더러운 오랑캐에 짓밟힌 지 2년이 다 되어간다. 오늘이 바로 회복할 때다. 명나라 군사의 수레와 말 울음 소리를 하루가 1년이 되는 것처럼 기다렸다(淪陷腥將及兩歲 恢復之期 正在今日 政望天兵車馬之音 以日爲歲). 그런데도 적을 무찔러 없애지 않고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흉악한 무리들이 잠시 물러나 있으나, 우리나라는 수년 동안 침략당한 치욕을 아직도 씻지 못하고 있다. 하늘까지 닿은 분노와 부끄러움이 더욱 사무친다.

<악비초상화, 정충록>
이 메모들은 모두 이순신의 평상시 자세와 결의를 아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 메모들의 근본적인 연원은 선조 18년(1585년)에 선조의 명령으로 간행된 중국 송나라 명장 악비(岳飛, 1103~1141)의 전기인 《정충록(精忠錄)》과 관계 있다. 악비는 ‘중국의 이순신’으로 불려도 손색없는 인물이다. 시호도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한 때는 ‘충무(忠武)’였다.

위로부터 세 번째까지 메모는 류성룡이 《정충록》의 내용 해설과 간행 경위를 쓴 발문(跋文)에 나오는 문장이다. “한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바다가 함께 기뻐하네”는 현충사에 소장된 보물 326호 <충무공 장검>의 검명 중의 하나인 “三尺誓天 山河動色”와 거의 일치하기도 한다.

네 번째 메모는 《이충무공전서》에만 나오는 1595년 5월 29일 일기에도 나온다. 그러나 이 역시 《정충록》에 있는 문장이다. 특히 악비가 송나라 황제에게 올린 소(疏)과 일치한다. 다섯 번째 메모 중에서 “더러운 오랑캐에 짓밟힌 지 2년이 다 되어간다. 오늘이 바로 회복할 때다. 명나라 군사의 수레와 말 울음 소리를 하루가 1년이 되는 것처럼 기다렸다”는 《정충록》의 문장을 일부 변형한 것이다.

책이 귀했던 시대였다. 게다가 간행된 지 10년 정도 된 책이다. 게다가 심지어 전쟁 중이었다. 그 상황에서 이순신이 오래전에 읽고 암기를 했든 혹은 새로이 찾아 읽었든 어쨌든 이순신이 《정충록》 속의 류성룡의 글을 메모하고, 악비의 글을 인용 혹은 변형한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임진왜란과 유사한 상황인 금나라의 송나라 침략, 금나라에 맞서 항상 승리했던 악비의 삶 때문이다.

이순신은 무기력한 송나라 역사를 통해 역사의 교훈을 되새겼다. 악비가 승리했던 비법을 찾아 자신의 현실에 적용하고자 했다. 명장이 짊어져야 할 고뇌와 시련을 미리 경험해 스스로 준비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것이 위 메모를 쓸 때의 이순신이고, 이순신의 몸부림 흔적이기도 하다.

류성룡은 이순신을 발탁하고 후원했지만, 류성룡이 이순신에게 정말로 도움을 준 것은 어쩌면 그가 발문을 쓴 《정충록》 그 한 권의 책이었을지 모른다. 한 권의 책이 삶을 바꾸는 증거가 류성룡과 이순신, 악비의 만남이 아닐까. 또 이 메모에는 끊임없이 학습만이 성공한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라는 증거가 담겨 있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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