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구조명분 해군함정 영해 침범일촉즉발 위기 

1985322일 새벽, 검푸른 어스름이 뒤덮인 전남 신안군 소흑산도 앞바다에 국적 불명의 어뢰정 한 척이 소리없이 떠내려왔다. 몇 시간 뒤 근처를 지나던 한국어선 제6어성호에 발견된 이 어뢰정의 정체는 중국 해군 북해함대 소속의 고속어뢰정 3213. 배 안에는 중상을 입은 병사 2명과 사망자 6명 등 모두 19명이 타고 있었다.
 
3213호는 전날 저녁 다른 어뢰정 5척과 함께 기동훈련을 마치고 산둥반도의 칭다오(靑島)항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관에게 불만을 품은 병사 2명이 AK-47 자동소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배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결국 3213호는 편대를 이탈해 동쪽으로 항해하다가 연료가 떨어지면서 흑산군도 근해에 표류하게 된 것이었다.
 
3213호의 표류 자체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 정부가 이를 미리 예상하고 비공식 채널을 통해 한국 정부에 사고 어뢰정의 구조를 요청해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중 간에는 아직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았던 터라 구조 요청은 중국 관영매체인 신화통신 홍콩지사 관계자가 주홍콩 한국총영사관을 방문해 전달했다. 이에 따라 3213호를 처음 발견한 제6어성호는 어뢰정을 전북 부안군 하왕등도 부근으로 예인해 정박시켰고, 해양경찰청 측은 즉시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날 발생했다. 사라진 어뢰정을 찾아나선 중국 해군 함정 3척이 323일 오전 650분께 3213호가 정박해 있는 하왕등도 영해에 진입한 것이었다. 미리 구조를 요청해두긴 했지만 사실상 적성국인 한국 정부의 협조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우리 영해를 침범한 해군함정은 중국 해군 내에서도 최정예 부대라 할 수 있는 3900t LUDADDG 109함과 1500t급 예인함, 1tPCS-705함 등이었다.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인명구조였지만, 사전에 우리 정부에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영해를 침범한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 행위였다.
 
현장에 있던 우리 해군함정은 중국 함정에 즉각 퇴거를 요구했지만 중국 측은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양측의 대치가 시작됐고, 결국 우리 공군 전술기까지 출동하면서 일촉즉발의 긴장된 상황이 조성됐다.
 
그 시각 국방부에서는 노신영 당시 국무총리 서리 주재로 관계부처 장관회의가 긴급 소집됐다. 국방부 측에서는 영해를 침범한 외국 군함을 즉각 무력으로 퇴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원경 당시 외무부 장관은 평화적 해결의 필요성을 역설해 간신히 외교적 노력을 위한 24시간의 말미를 얻어냈다.
 
그러나 중국과는 공식 외교창구가 없었기에 우회로를 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외무부는 우선 주한미국대사관의 헨리 던롭 정무참사관과 주한일본대사관의 아라 요시히사 정무공사를 초치해 중국 함정은 즉각 한국 영해 밖으로 퇴각하라는 요구를 중국 외교부에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지만 우리 측의 요구는 즉각 중국 측에 전달됐고, 중국 군함들은 우리 영해에 진입한 지 약 3시간 만인 오전 940분께 퇴각했다. 신속한 외교적 대처 덕분에 일단 군사적 충돌은 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골치 아픈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어뢰정 3213호와 승무원들의 처리 문제였다. 3213호의 표류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면서부터 이미 주한대만대사관 관계자들이 분주하게 외무부를 드나들고 있었다.
 
대만 측의 요구는 어뢰정과 승무원들을 대만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진수지(金樹基) 주한대만대사는 어뢰정 승무원들을 귀순자로 봐야 하며 그들의 자유 의사를 확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외무부 내부에서도 이들을 대만으로 보내자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김석우 당시 외무부 동북아1과장(전 통일부 차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중국 군함 안에서 해상반란 사건이 벌어진 것이므로 해양법 원칙에 따라 군함의 기국(旗國)인 중국으로 군함과 승무원을 송환해야 한다고 이원경 장관에게 건의했다.
 
김 전 차관의 이 같은 건의는 밤새 국제법 서적을 뒤진 뒤 나온 것이었다. 국제 해양법은 해상반란이 일어난 경우 공해건 영해건 군함의 지위에 관한 기국(旗國)의 강력한 관할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해양법 형성 초기 단계부터 5대양을 지배하던 해양국가 영국이 그 기본틀을 정했기 때문이었다.
 
김 전 차관은 대학원에서 해양법을 전공했을 뿐 아니라 동북아1과장에 앞서 국제법규과장을 지낸 외무부 내의 국제법통()’이었다. 초임 사무관 시절 대륙붕 제 7광구의 기초가 된 해양법적 근거를 찾아낸 것도 해박한 국제법 지식 덕택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우리 정부는 19835월 발생한 중국 민항기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중국 측과 정식국명을 적은 외교문서를 교환하는 등 이미 한 차례 소통의 물꼬를 터놓은 상태였다. 또 이범석 전 외무부 장관도 19836월 국방대학원 특강에서 대()공산권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북방정책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바 있었다.
 
그러한 정책의 연장선상에서라도 이번 일은 어뢰정 3213호에 대한 중국의 관할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김 전 차관의 생각이었다. 결국 우리 정부는 김 전 차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고 어뢰정과 승무원들을 중국으로 송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정부는 중국 군함의 한국영해 침범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한 태도를 견지했다. 넘길 것은 넘겨주되 따져야 할 문제는 분명히 따지겠다는 것이었다. 외무부는 우선 중국 함정들이 우리 영해에서 퇴각하는 시점에 맞춰 영해 침범에 대한 엄중한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날 주홍콩 한국총영사가 신화통신 홍콩지사의 외신부장에게 우리 정부의 항의각서를 전달하고 사과와 책임자 문책, 유사사건의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중국 정부 역시 우리 측의 항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중국 외교부는 우선 자국 군함들이 한국 영해를 벗어날 즈음 성명을 발표해 실종된 어뢰정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해군 함정 3척이 부주의로 한국 영해를 침범했다고 시인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326일에는 자국 군함의 한국 영해침범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하는 각서를 주홍콩 한국총영사관을 통해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이 각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명을 받은(Authorized by)’ 신화통신 홍콩지사 부사장이 주홍콩 부총영사 앞으로 보낸 것이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중국 측이 이 각서에서 사과의 가장 높은 단계인 ‘Apology’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었다. 중국 측은 영해 침범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은 물론 책임자 문책과 재발방지까지 약속했다. 이처럼 정중한 사과는 한중관계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 정부는 중국 측의 이러한 사과를 받아들여 이틀 뒤인 328일 오전 11시 양국의 중간 지점인 위도 36N, 경도 124E 지점에서 어뢰정과 승무원 전원을 중국에 인계했다. 이로써 일주일 동안 세계의 이목이 쏠렸던 중국 어뢰정 사건은 평화적으로 마무리됐다.
 
훗날 드러난 것이지만, 이 사건은 이후 한중수교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는 첸치천(錢其琛) 전 중국 외교부장의 회고록에도 생생히 기록돼 있다. 첸 전 외교부장은 회고록 외교십기(外交十記)’에서 “19854월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외교일꾼들에게 이제 남한과 수교를 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지침을 줬다라고 적고 있다.
 
<윤광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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