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 15년 전 중국과의 약속 뒤집을 기세
경제상황 들먹이며 중국산 덤핑 막으려 말 바꿔

[일요서울 | 곽상순 언론인] ‘선일자(先日字)수표’는 발행일보다 결제일을 뒤로 잡은 수표다. 예를 들어 2016년 6월 1일 수표를 발행하려는데 은행 잔고가 부족하다. 그런데 한 달 뒤에는 잔고가 충분해질 예정이다. 그래서 수표를 받는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표 발행일을 2016년 7월 6일쯤으로 늦춰 발행하면 선일자수표가 된다. 2001년 12월 11일 중국은 고대하던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이 됐다. WTO에 가입하려면 기존 회원국들과 가입조건을 놓고 길고 험난한 협상을 벌여야 한다. 중국도 그런 과정을 거쳐 WTO에 가입했다. 당시 유럽연합(EU)은 중국을 WTO에 받아들이면서 “지금은 우리가 중국을 ‘비(非)시장경제국’ 자격으로 가입시키지만 가입 시점으로부터 15년이 경과하면 그 때에는 ‘시장경제국’으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말하자면 중국에 시장경제지위(market economy status·MES)를 주기는 주되 15년 후, 즉 2016년 12월 11일에 주겠다고 선일자수표를 끊어준 것이다. 그랬던 EU가 막상 ‘결제일’, 즉 MES 인정 시작 시점이 몇 달 앞으로 다가오자 “어디, 두고 보자”며 딴소리를 하고 있다. 중국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유럽연합-중국 협약문서
해석 모호해 ‘이목집중’

EU의 입법부인 유럽의회는 5월 11일 찬성 547 반대 28 기권 77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EU가 올 연말 중국을 MES로 인정하는 것에 반대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 이유는 WTO 가입협약을 준수해 중국을 MES로 인정하면 EU는 중국에 의한 불공정 무역관행으로부터 자체 산업들을 보호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유럽 산업계는 중국이 수출을 촉진하고 해외에서의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정부 보조금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중국 경제가 여전히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있으므로 중국에 MES를 줄지 여부를 가늠할 때 유럽 각국은 반드시 이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번에 유럽의회가 중국 MES와 관련해 발표한 결의는 구속력이 없다. 하지만 중국에 MES를 줄지 안 줄지를 결정할 마감시한이 다가오면 유럽의회는 이 문제를 놓고 그 때에는 구속력 있는 표결을 해야 하며, 이 사안이 유럽의회를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EU 각국 정부의 승인을 거쳐야 확정된다. 유럽의회가 5월 중순 일찌감치 중국 MES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놓은 것은 올해 하반기 본 표결에서도 반대하겠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어서 중국 입장에서는 불리한 사태 전개다. 그리고 그것은 중국으로서는 강한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EU의 매몰찬 정치 행위다.

중국이 “15년만 지나면 MES를 인정하겠다고 해 놓고 지금에 와서 딴소리냐?”라고 EU에 본격적으로 항의하는 목소리는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내심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유럽의회의 반(反)중국 결의안 채택에 즈음해 유럽의회 내에서 두 번째로 큰 정치집단인 ‘사회주의자와 민주주의자의 진보적 동맹’의 지안니 피텔라 총재는 “오늘날 현 상태로는, 그간 달성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시장경제가 아니다”면서 만약 우리가 그냥 밀고나간다면, 우리는 유럽 산업의 자살을 수행하는 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철강협회의 악셀 에거트 사무총장은 “유럽의회의 메시지는 아주 명확하다”면서 “중국은 시장경제가 아니며 따라서 반(反)덤핑 조사 목적을 위해 그와 같이 취급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중국에 MES를 인정하면 중국산 철강에 대한 반덤핑 조사가 EU 쪽에 불리해진다는 이야기다. 분명히 중국의 WTO 가입 시점으로부터 15년 뒤 중국에 MES를 인정하겠다고 해놓고 지금에 와서 국내정치 상황을 들먹이며 “시대가 변했다”라고 변명하는 EU에 대해 중국은 원망을 넘어 분노를 느낄 수 있다.

중국 무시 못해
약속은 지킬 듯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중국의 WTO 가입협약의 해석이다. 이 협약 15조는 중국이 불공정하게 낮은 가격으로 수출하고 있을 때, 즉 중국이 덤핑을 하고 있다는 혐의를 가늠함에 있어 회원국들이 중국을 “비(非)시장경제”로 취급하는 것을 허용한다. 덤핑을 의심받는 국가가 시장경제 지위를 가지면 불평하는 국가들은 그 나라의 수출가격을 그 나라의 국내시장 가격과 반드시 비교해야 한다. 그런데 중국과 여타 비(非)시장경제 국가들에 대해서는, 불평하는 국가들은 다른 비슷한 국가들을 비교대상으로 사용하도록 허용된다. 이 문제는 중요하다. 현재 중국만큼 자주 덤핑 혐의를 받는 나라는 없다. 현재 EU 집행위원회에서 조사 중인 덤핑사례 38건 중 28건이 중국과 관련돼 있다. WTO 규정은 덤핑 제품에 대해 회원국들이 상당히 무거운 징벌적 관세를 매기도록 허용한다. 하지만 협약 15조는, 만약 중국의 생산자들이 시장조건이 그들의 산업에서는 보편적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 때에는 수입하는 국가가 반드시 중국내 가격을 비교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어떤 경우에든” 비(非)시장 추정은 중국의 가입 이후 15년 만에, 즉 2016년 12월 11일 만료된다고 되어 있다.

이 대목이 참으로 묘하다. 중국은 이 구절을 MES 보증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엄격히 따지면 그 구절은 수입국들이 반(反)덤핑 목적으로 중국을 비(非)시장경제로 취급하는 권리를 자동적으로 상실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들의 국내법에 따라 중국에 전면적인 MES를 부여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 중국은 자국을 뺀 세계 3대 경제권인 EU, 미국, 일본뿐만 아니라 캐나다, 멕시코, 인도에서도 MES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실로 많은 것이 15조의 해석에 달려 있는 셈이다. 현재 EU 내에서 영국, 네덜란드, 북유럽 국가들은 찬성 쪽인 반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지중해 국가들은 반대다. 하지만 미국이 우려하는 대로 유럽은 결국 상업적 이득을 위해 중국에 MES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중국이라는 막강한 돈 보따리를 유럽이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국이 주도해 지난해 설립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미국의 우방들이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줄줄이 참여했던 전례에 비추어 EU의 대(對)중국 MES 부여 문제는 결국 중국의 승리로 끝날 공산이 크다.
ilyo@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