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장성훈 국장] 솔직히 말해 그는 참 안(?) 생겼다. 자전적 노래 ‘못생겨서 죄송합니다’를 불러 인기를 끌었던 고(故) 이주일 씨 못지 않다. 외모만 놓고 평가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하다. 사실이 그럼에도 그의 인기는 예나 지금이나 식을 줄 모른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더 하다. 고희(古稀)를 넘긴 나이에도 말이다. ‘연구대상’이다.
솔직히 말해 그는 참 운이 좋다. 인기가수라면 아무리 그래도 자기만의 히트곡 몇 개는 있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자기 노래가 그리 많지 않다. 노골적으로 말해 ‘화개장터’를 제외하면 사실상 전무하다시피하다. 그가 불러서 히트친 곡은 거의가 번안곡이다. 그럼에도 그는 40년 넘게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불가사의’가 따로 없다.
솔직히 말해 그가 그림을 정말 잘 그리는 화가인지는 잘 모른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어쨌든 그가 그리는 그림은 참 잘도 팔린다. 값도 다른 화가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높다. 어떤 것은 수천만 원을 한다니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다. 가수로 얻은 명성을 기가 막히게 잘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짜증나게 머리가 좋은 것 같다.
그에게는 필부에게 없는 또 하나의 캐릭터가 있다. ‘자유로움’이 그것이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가는 사람 말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조(趙)비어천가’를 부르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를 ‘철 들기를 거부하는 ‘천재’라고까지 묘사한다. 철이 들면 세상과 타협하기 때문이란다.
그가 바로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 씨다. 친일 언행을 비롯해 그 동안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그때마다 운 좋게, 참으로 운 좋게 오뚝이처럼 재기했던 그가 이번에 ‘임자’를 제대로 만났다. 그림 ‘대작’ 논란에 휩싸이면서 사면초가에 처한 것. 사실 외국에서는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도덕성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 정서로 볼 때 그는 ‘위기의 남자’임에 틀림없다. 국민 다수가 그의 그림 ‘대작’이 사기라고 믿고 있어 더욱 부담스럽다.
필자는 미술 쪽에 문외한이다. 그러니 미술계의 ‘관행’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른다. 다만, 조영남 씨 논란에 대한 소견을 다음의 예로 갈음한다. 보통 “누가 빨래했느냐”라고 물으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또는 “아무개가 했다”라고 한다. 누가 됐든, 사람이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 세탁기가 빨래를 한 것이다. 사람은 그저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고, 물 틀고 세제 넣은 일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했다고 우긴다. 조영남 씨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솔직히 필자는 조영남 씨의 그림 ‘대작’ 행위가 ‘사기’인지 ‘관행’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준 ‘자유인’이라는 별명이 과연 적절한지에만 흥미가 있을 뿐이다. 한 때였지만, 필자 역시 조영남 씨처럼 ‘자유인’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한다. 사전적 의미로만 볼 때 조영남 씨는 분명 ‘자유인’ 부류에 속한다. 지금까지 초지일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진정한 자유가 있기나 한 것일까?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다만 자유의 문화라는 틀 안에서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태어나면서 우리는 다양한 환경을 통해 자극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내면화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면 좋겠는데 그럴 수가 없다. 그것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하든, 우리는 그 무언가에 얽매이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자유롭다는 말은 단지 우리가 자유로운 문화적 가치의 틀 안에서만 그렇다고 주관적으로 느낄 뿐이다. 결국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자유와 상충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자유를 누린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누리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논어까지 들먹여야겠다. 위정편에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는 말이 있는데, 나이 70이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즉, 있는 욕심 다 부려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로 치면 ‘해탈’이고, 기독교에서는 ‘성화’ 상태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만 ‘진정한 자유인’이라는 칭호가 붙게 되는 것이다.
조선 초, 동생 충녕대군(훗날 세종)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긴(양보했다는 설도 있음) 후 초야에 묻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던 양녕대군을 혹자는 한 시대를 원 없이 살다 간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부른다. 자유인임에는 분명하지만,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하기에는 ‘함량미달’이다. 그는 자신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툭 하면 남의 여자를 탐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백성들에게 입힌 ‘패륜아’였다. 그러나 양녕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공자의 말씀대로라면 ‘득도’할 나이가 되지 않았기에 그런 기행을 저질렀다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70세가 되기 전인 68세에 세상을 뜨긴 했다. 그게 그거 아닌가?
조영남 씨의 나이 올해로 71세. 마음먹은 대로 자유롭게 살아온 것 까지는 맞는 것 같은데, 아쉽게도 실수를 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닌 듯하다. 그 실수가 ‘관행’ 수행 중에 발생한, 불가피했던 것이라 해도 말이다. 이 번의 ‘대작’ 논란을 계기로 조영남 씨는 종심소욕불유구라는 말의 의미를 한 번 새겨봄이 좋을 것 같다. 논어 읽기가 귀찮으면 그냥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사시라. 다만, ‘자유인’이라 자칭하지는 마시라. 설사 누군가 그렇게 부른다 해도 말이다.
seantlc@ilyoseoul.co.kr
장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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