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시스>

2002년과 2014년 재정악화로 국가부도 맞아
국제금융시장에서 채권 발행해 상환자금 마련

[일요서울 | 곽상순 언론인] 프라트 가이 아르헨티나 재무장관은 지난 4월 22일 “금지명령이 풀렸다. 더 이상 족쇄는 없다. 더 이상 죔틀이 없다. 채무불이행이여 안녕. 새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성장을 시작할 준비가 됐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빚쟁이들을 상대로 지루하게 벌여온 채무 조정 협상이 이날 마침내 타결된 데 대한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이 돈이라도 받아라.”(아르헨티나 정부) “못 받겠다. 원금에다 최초에 약속했던 이자를 전액 얹어줘야 받겠다.”(아르헨티나 정부의 일부 채권자들) 이처럼 팽팽하게 대립해온 양자(兩者)가 미국 법원의 중재로 마침내 화해함으로써 아르헨티나가 14년 만에 국가 부채를 완전히 상환할 수 있게 됐다.

버티는 채권자들과
10년간 협상 진행

아르헨티나는 2002년 1차 국가부도를 낸 뒤 아르헨티나 국채를 보유한 채권자들을 상대로 “빚을 좀 깎아 달라”며 부채 재조정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자 채권자들 가운데 일부는 국가 재정이 파탄 난 아르헨티나의 딱한 사정을 헤아려 협상에 응했지만 ‘악바리’ 채권자들은 원금과 이자를 전액 다 받아야겠다며 협상을 거부하고 근 10년간 소송을 벌여왔다. 이 소송이 이날 채무자·채권자 간 화해로 종결된 것이다. 이는 아르헨티나 입장에서 전임 대통령들이 거덜 낸 아르헨티나 경제를 마우리시오 마크리 신임 대통령이 국제 금융시장을 설득하는 데 성공해 일궈낸 쾌거로 꼽힌다.

미국 뉴욕 맨해튼 법원의 토마스 그리에사 판사는 아르헨티나 정부가 채권자들에게 일정한 상환금을 지불한 사실을 확인하고 “아르헨티나는 협상을 거친 국채에 대한 상환을 재개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2002년에 이어 2014년 아르헨티나를 또 다시 국가부도로 몰고 갔던 법원의 금지명령이 풀린 것이다. 아르헨티나 정부와 채권자 사이의 법적 분쟁에 대해 미국 법원이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은 아르헨티나 정부의 채권자들 가운데 한 명인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회장 폴 싱어가 지난 2014년 6월 “폴 싱어가 아르헨티나 정부의 부채 상환에 응할 때까지 여타 채권자들은 부채를 상환 받을 수 없다”는 판결을 미국 법원에서 얻어냈기 때문이다. 재조정된 부채를 상환하는 것을 막은 그 금지명령은, 부채를 상환받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악바리 채권자들을 “벌처펀드(파산한 기업 등을 싸게 인수해 비싸게 되파는 헤지펀드)들”이라고 비난했던 마크리의 전임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와 투쟁하도록 일부 채권자들에게 그리에사 판사가 허용했던 숱한 강경전술 가운데 하나였다. 그랬던 그리에사 판사가 자신이 내렸던 금지명령을 철회함으로써 아르헨티나 새 정부는 적극적으로 부채 상환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아우렐리우스 캐피털 매니지먼트와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NML캐피털이 주도한 그 펀드들은 이날의 법원 조정으로 60억 달러 이상을 상환 받은 채권자들에 포함됐다. 아르헨티나는 또 지난 2월 29일까지 화해가 성립되지 않은 채권자 몫으로 상환금 약 30억 달러를 법원에 공탁했다. 이로써 국채 상환은 사실상 끝났다.

법원이 지명한 중재자인 대니널 폴락은 그리에사 판사의 결정이 나온 뒤 발표한 성명에서 “그리에사 판사는 내게, 마크리 대통령의 당선 이후 극적으로 달라진 아르헨티나의 환경의 결과로서 그의 재량권을 행사해 금지명령을 철회할 수 있는 것이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안겨주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의 이러한 설명은 아르헨티나의 새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 하고 있어 그리에사 판사가 이에 감동해 이전의 결정을 번복했다는 의미다. 마크리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취임 이래 국제 금융시장과 화해하는 데 집중해왔다. 그러면서 그는 이전 정권에게서 물려받은, 당시 최대 규모였던 2002년의 1000억 달러 국가부도라는 두통을 치유하려 노력했다. 그는 악바리 채권자들과의 타협이 외국인 투자의 물꼬를 터 인플레를 끌어내리고 침체한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이에 진력했다. 지금까지 그가 거둔 최대의 성공은 지난 4월 19일 아르헨티나가 165억 달러의 국채를 판매한 것이다. 이 국채 발행은 개도국 물량으로서는 사상 최대이며 아르헨티나가 15년 만에 처음 국제 금융시장에서 성사시킨 발행이다. 이 국채발행으로 아르헨티나는 그리에사 판사의 호의에 기초해 이뤄진 법원 조정에 따른 지불금을 마련했다. 국채발행은 또 아르헨티나 기업들이 채권을 발행할 길을 닦았다.

미국 법원의 중재 덕분
채무 전액 상환에 성공


맨해튼 법원에서 금지명령 철회를 얻어내기까지 그간 아르헨티나가 국가채무 때문에 겪은 수모는 엄청났다. 2014년 7월 30일 아르헨티나는 2002년에 이어 12년 만에 다시 국가부도를 냈다. 채권자들에게 지급하려던 이자 5억3900만 달러의 지급기한을 본의 아니게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그 해 아르헨티나는 채권자들과 오래 협상한 끝에 “일단 원리금의 30% 정도를 조만간 갚고 나머지 원리금을 형편 닿는 대로 갚을 테니 우선 이자로 이 돈이라도 받아가라”고 채권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5억3900만 달러를 마련해 채권자들에게 나눠줄 참이었다. 채권자들 대다수는 아르헨티나의 2002년 국가부도 때 이 나라에 돈을 물린 투자자들이었다. 그런데 그해 6월 채권자 가운데 한 명인 싱어가 앞에서 말한 금지명령을 맨해튼 법원에서 얻어냈다. 아르헨티나는 애당초 채권을 발행할 때 “채권 상환 절차는 미국 법원 결정에 따른다”고 동의했으므로 미국 법원의 결정은 구속력이 있었다. 싱어는 아르헨티나 정부가 다른 채권자들을 설득해 빚을 갚는 것은 그가 알 바 아니지만, 그와 몇몇 채권자는 모두 합쳐 15억 달러를 받아야겠다고 버텼다. 싱어의 요구를 들어줄 힘이 없었던 아르헨티나는 결국 국가부도를 내고 말았다. 앞서 싱어는 1996년 정부가 지급 보증한 페루 은행 부채를 약 1100만 달러에 사들였다. 4년 뒤인 2000년 페루 정부는 이 부채에 대해 5800만 달러를 지급했다. 싱어는 이 건으로 400% 넘는 수익을 올렸다. 당시 페루 정부를 대표했던 변호사 마크 심롯은 싱어를 가리켜 “그는 곤궁한 국가를 찾아 그곳 부채를 매입하고 완전 변제를 요구한다. 그는 그 나라의 경제상황, 빈곤, 형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면서 “그의 입장에서 그는 ‘그게 뭐가 잘못됐나?’고 말할 것이다. 당신도 그가 옳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면 그런 식으로 돈을 벌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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