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이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수십만 명의 인파로 들썩이던 곳. 예전의 월미도는 인천의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주말마다 몸살을 앓았다. 지금은 조금 뒤처진 이미지로 남았지만 이 모든 것을 한때의 영화로 추억하기엔 아직 이곳을 기억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조금 유치하고 낡았으면 어떤가. 다시 가본 월미도는 여전한 모습으로 그렇게 새로운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월미도에 도착하자마자 소녀들의 즐거운 비명이 들려왔다. 하늘로 높이 솟았다가 내려온 후 다시 반대편 하늘로 치솟는 바이킹. 형형색색으로 꾸며진 이 놀이기구는 10여 년 전 처음 월미도를 여행했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하늘을 가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전히 ‘놀이공원’이라는 타이틀에 충실하고 있는 디스코 팡팡과 화려한 입담의 DJ도 그대로다. DJ의 면박을 실시간으로 받으며 놀이기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으면서도 즐겁기만 하다. 한 시간씩 기다렸다 오 분도 채우지 못하고 내려오는 매머드급 놀이공원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다.

90년대 초에 생겨나 오늘날까지 월미도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화려함보단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재미에 충실했다. 그 결과 수많은 지방의 ‘랜드’들이 추억 속으로 사라져가는 동안에도 월미도 놀이공원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날로그식 충전이 필요한 6월, 다시 월미도를 들여다봤다.

출구는 하나다, 인천역

대중교통으로 가장 편리하게 월미도 여행을 하는 방법은 역시나 1호선 전철을 이용하는 것이다. 서울 중심에서 탑승한 1호선 열차는 종착역인 인천역으로 향하는 동안 조금씩 인파를 덜어냈다. 인천역에 다다를 무렵 열차 한 칸에 앉아 있는 승객은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줄어 있었다.

몇 분 전까지 서있기조차 힘들던 열차였는데, 한적한 객차의 의자 위에는 완연한 봄의 햇살만이 내려앉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인천 구도심의 풍경, 그리고 햇살을 받으며 비어 있는 객실의 의자. 이 단순한 풍경이 피로했던 시선을 정화시킨다.

인천역에 도착해 출구를 찾으니 그저 ‘나가는 곳’이라는 푯말이 유일한 이정표였다. 복잡한 계단과 여러 가지 출구 번호를 찾을 필요도 없이 오직 한길로 나 있는 길. 그저 단순하고 명료한 이 길이 괜히 반갑다.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인천에서 출발해 12시간을 걸어야 서울에 닿았다던 안내문구와 함께 한국철도 탄생역임을 알리는 비석이 광장 중앙에 서 있다. 인천역 광장에서 월미도까지는 택시로 기본요금에 해당하는 거리. 불과 한 시간 전에 복잡한 도심 속을 오가다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바다여행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 월미도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아직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전이라 이 섬을 걸어보기로 했다. 반달의 꼬리처럼 휘어져 있다 해서 붙은 이름, 월미도. 그 이름처럼 반달의 동선을 따라 해안도로를 걷다보면 굳이 지도를 펼치지 않아도 이 섬의 모든 즐거움과 마주할 수 있다.

바다 그 이상의 의미,
월미 달빛마루 전망대

물범카에 탑승하는 시간은 무척 짧았다. 10여 분도 지나지 않아 벌써 전망대로 가는 길에 도착했다. 전망대인 월미 달빛마루에서 바라보는 인천항의 모습은 여느 바다풍경과는 조금 다르다. 철썩이는 파도와 여유로운 갈매기, 그리고 바다 위를 떠가는 고기잡이배들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인천항과 연안부두에 가득 쌓인 컨테이너 박스들과 수출용 차량들이 정렬된 미니카처럼 부두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또한 월미산에서만 볼 수 있는 이색적인 바다풍경이 아닐까. 해가 기우는 늦은 오후 월미테마파크의 놀이기구에 불이 켜지기 시작하면 먼 등대의 불빛과 남겨진 컨테이너 박스들이 특유의 쓸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언젠가 보았던 1800년대 후반 인천항 주변의 흑백사진이 떠올랐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한 사내는 갓을 쓰고 곰방대까지 물었다. 인천항에는 키 작은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바다를 향해 모여 있었고 항구라고 하기엔 너무나 소박해 보이는 바닷가에는 나룻배 몇 척만이 떠있을 뿐이었다.

그 후 이렇게 거대한 모습으로 발전하기까지 이 부두를 통해 들어오고 나갔을 수많은 사연을 짐작이라도 해볼 수 있을까. 전망대 통유리를 통해 바라보는 인천항은 오후의 태양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일 뿐 아무 말이 없다.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첫 해외 이민을 떠났던 곳도, 해외 문물이 서울로 유입되는 첫 관문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저 삭막하다는 표현으로 인천항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아쉽다. 이 바다를 통해 흘러갔을 고단한 삶의 이야기들이 오늘날의 인천을 존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둥산에서 다시 숲을
이루기까지, 월미산

해안도로를 따라 조성된 문화의 거리와 함께 월미산을 포함한 월미공원도 이 섬의 관광코스로 자리 잡았다. 밤이 되면 더욱 흥미로운 문화의 거리는 조금 후로 미뤄두고 먼저 공원에 들렀다.

지난 50여 년간 군부대의 주둔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었다가 개방된 월미공원. 때문에 생태계가 보존되어 있는 대자연과 인천의 바다풍경까지 모두 담아갈 수 있다. 조금 더 욕심을 내본다면 월미산 정상에 위치한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몇 해 전 월미산을 처음 개방했을 때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담고 싶어 조금 가파른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갔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전망대에 오르는 것을 망설이던 차에 공원 입구의 물범카가 눈에 들어왔다.

공원안내소를 출발해 월미산 정상까지 운행하는 이 작은 셔틀카 덕분에 다시 한 번 인천항의 풍경을 담을 수 있었다. 느리기에 월미산의 자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물범카에 올라 정상으로 향하는 길.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최초 지점으로 민둥산처럼 흉물스럽게 변해버렸던 그 산이 맞는가 싶다. 울창한 나무들과 봄날의 야생화들이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지천으로 피었다.

전쟁의 상처가 할퀴고 간 민둥산이 이렇게 울창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았을지, 촘촘하게 하늘을 가린 나뭇잎 사이사이로 내비치는 햇살이 새삼 소중하기만 하다.

겔릭호를 탄 사람들,
한국 이민사 박물관

월미산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 발길은 자연스레 이정표를 따라 이민사 박물관으로 향한다. 월미산 산책로 곁에 자리 잡고 있는 이민사 박물관은 월미도와 무척 잘 어울리는 박물관이다.

인천항을 통해 미지의 땅인 하와이로 한국 최초의 이민을 떠난 사람들. 그들이 탑승했던 겔릭호의 역사와 이민자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7000여 명이라는 최초의 이민자들이 인천항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태평양을 건넜다. 이민선에 오른 사람들의 군상도 다양했다. 유학생, 선비, 역부, 군인, 머슴, 목회자, 건달……그 사이에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한배에 올랐다고 한다.

“미리견(미국)이라는 나라에는 돈나무가 있다더라.” 끝없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이민자들이 주고받은 말을 보니 그 당시 한국의 가난과 기근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도착한 하와이에는 한국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열대의 강한 햇빛이 먼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타는 듯한 태양과 씨름하며 중노동을 해야 했던 이민자들. 이미 하와이 땅에 정착해 살아가던 다른 나라의 이민자들 사이에서 한인들은 더 질기게 살아내야 했다.

그 단편소설과 같은 이야기에 매료되어 한참을 박물관에 머물렀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던 그들의 가슴은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설렘과 기대로 뒤섞여 저 바다의 파도처럼 요동쳤을 것이다. 1902년, 벌써 100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다.

반드시 새로울 필요는 없다,
월미 문화의 거리

월미도가 유원지라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강하게 심어준 거리는 단연 ‘월미 문화의 거리’일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월미테마파크와 마이랜드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인 놀이공원이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월미도 내에만 크기가 조금씩 다른 대형 바이킹이 세 대나 운영되고 있고, 크고 작은 놀이기구 주변으로 수많은 상점들이 문을 열고 닫으며 월미도를 지켜왔다. 문화거리의 총 길이는 그리 길지 않지만 이 길을 감싸고 있는 풍경이 다름 아닌 갈매기가 날아오르는 바다라는 점은 그 어떤 유원지와도 견줄 수 없는 매력이다.

게임시설조차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투수 연습장을 포함한 타자 연습장, 다트로 풍선을 터트리거나 사격으로 점수를 내는 식의 게임들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만 더, 라는 승부욕에 불타오르게 만들던 추억의 게임들이다.

산책로 끝자락에 모여 있는 횟집 간판들도 저마다 주인장의 재치를 대변하고 있다. 간다간다 뿅간다, 어쭈구리 대박났네, 삐삐부인 진동왔네 등이 횟집의 이름들이다. 모두 작정한 듯 너스레를 떨고 있는 이름이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문화의 거리는 놀이공원과 싱싱한 먹거리, 그리고 유람선 선착장까지 이어지고 있다. 쭉 뻗은 거리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기에 이 거리를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이 여유롭기만 하다. 유독 연인들이나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은 문화의 거리만 따라 걸어도 만들 수 있는 추억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미도는 유행을 따라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듯 90년대 화려했던 시절의 모습 그대로다. 90년대에 생겨나 자취를 감춰버린 수많은 유원지들을 제치고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는 월미도의 힘. 더 빠르고 새로운 것은 누군가의 몫일 뿐, 월미도의 매력은 아날로그식 추억 만들기로 대변된다. 1호선 인천행 종점.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월미도 여행은 그래서 늘 풋풋하고 새롭다. 


[여행Tip] 월미도 식도락

가정식 회코스, 이경숙 아줌마 횟집

   
 
황해도가 고향인 아버지가 운영하던 횟집을 지금의 주인장이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 30년 이상의 횟집운영 노하우가 그대로 느껴지는 곳. 특히 일본 관광객들에게 소문난 가게로 가정식 회코스를 맛볼 수 있다. 2층 창가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저녁노을은 싱싱한 바다의 맛을 더한다. 오징어튀김과 해파리냉채, 산낙지와 쭈꾸미를 포함한 풍성한 서비스가 돋보인다.
인천 중구 북성동 1가 98번지 368호

경양식 레스토랑이 그리울 때, 카페 예전

월미도 카페 거리 사이에 적색의 벽돌 건물 ‘예전’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한 눈에 봐도 세월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움에 걸음을 멈추게 되는 이곳은 20년이 넘은 월미도의 대표 카페다. 직접 구워내는 식전 빵과 경양식 메뉴의 선물세트 격인 특선 정식은 이곳의 오랜 자랑거리. 돈가스와 스테이크, 생선가스, 홍합요리까지 한 번에 맛볼 수 있다. 낡았기에 더욱 앤티크한 가구들과 소품들이 경양식 레스토랑 분위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인천 중구 북성동 1가 98-444

추억 속으로

캠핑 분위기를 내며 조개구이를 즐길 수 있는 곳. 가게에 들어서면 군대 막사에 들어온 듯 한 착각이 들만큼 어마어마한 군용 소품이 눈에 띈다. 군복에서부터 철모, 식기, 차량까지 식사를 하기 전에 인테리어 소품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푸짐한 조개구이와 막회, 깔끔한 칼국수 국물은 이곳을 찾아가게 만드는 이유이다.
인천 중구 북성동 1가 98-535

 

원조 커피전문점, 미투

1991년 처음 문을 열고 지금까지 월미도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명당자리에 카페 미투가 있다. 월미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워낙 2층에서 바라보는 바다풍경이 수려해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종류의 커피와 음료의 등장으로 밀려났던 추억의 카페 메뉴인 파르페를 여전히 맛볼 수 있는 곳. 과일 칵테일과 넉넉한 아이스크림에 과자까지 더해 커다란 유리컵이 비좁을 정도다.
인천 중구 북성동 1가 98번지

 

<프리랜서 김소연 기자>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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