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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85.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해방 이전의 한국사가 통째로 사라졌다.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 고구려사가 삭제된 것과 관련해 우리 정부의 항의를 받은 중국이 고구려사를 포함한 해방 이전의 역사를 아예 들어내는 방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로써 2003년부터 계속됐던 이른바 동북공정을 둘러싼 한중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게 됐다. 1992년 수교 이후 대체로 밀월관계를 이어가던 한중관계 자체도 큰 위기에 처하게 됐다. 정부는 사안이 매우 심각하다고 보고 85일 당일 박준우 당시 외교부 아태국장을 중국에 급파했다.
 
북한의 왜곡 항의로 동북공정 본격화
 
평양 천도 이전 만주 지역의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보는 동북공정이 한중 현안으로 표면화된 것은 2003년부터다.
 
그러나 동북공정은 그보다 훨씬 앞선 198212월 제5차 전국인민대표자회의 때 태동했다. 중국은 당시 헌법 개정을 통해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채택했다. 현재 중국 영토에 존재했던 과거 민족·역사는 모두 중화민족의 일부라는 중화민족 이데올로기를 창조하기 위한 헌법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중화민족이란 개념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현재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이후 중국 학계에서는 역사적 수정주의가 등장했다.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맞춰 재해석하는 이런 움직임은 고구려사에도 적용됐다. 우리와 수교하기 전에 이뤄진 이런 움직임에 먼저 반응한 곳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19921993년 중국의 역사적 수정주의 움직임에 강하게 반발했다. 중국에 역사문제 대표단까지 파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북한의 반발로 오히려 중국의 수정주의 움직임이 강화됐으며 이는 2002년 동북공정으로 이어졌다.
 
박준우 전 벨기에·유럽연합(EU) 대사는 20132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반발하는 것을 본 중국이 슬슬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밝혔다.
 
표면화 된 동북공정 외교문제로 비화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중심이 진행한 동북공정은 시행 1년 뒤인 2003년에 중국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36월 중국 관영 광명(光明)일보와 차이나데일리가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논문을 게재한 것이 계기가 됐다. 중국의 움직임이 학술연구로 포장돼 있어 우리나라의 대응 논의도 학계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2004년 초 중국 역사학계 일부의 고구려사 편입 논란과 관련, 한중 양국은 그해 2월 왕이(王毅) 외교부 부부장 방한 때 고구려사 문제는 정부가 아닌 학술 차원에서 다루자고 합의했다. 이에 따라 정부도 41일 고구려연구재단(현 동북아역사재단)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중국은 같은 달 중순 외교부 홈페이지에 소개된 한국 역사에서 고구려 부분을 전격적으로 삭제했다. “서기 1세기 전후 한반도 북부 일대에서 출현했으며 신라, 백제, 고구려 등으로 분할된 정권이었다는 한국의 역사 소개에서 고구려 표현만 뺀 것이다.
 
정부는 이런 사실을 7월 확인하고 서울과 베이징의 외교채널을 연쇄적으로 가동, 중국에 강하게 공식 항의했다. 정부도 더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부는 고구려사 실무대책협의회도 열고 정부 차원의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중국 측에 홈페이지의 고구려사 부분을 복원해줄 것을 요구키로 정하고 이런 방침을 통보했다. 그러나 중국은 85일 해방 이전의 역사를 아예 들어내는 방식으로 우리의 문제제기에 대응했다.
 
사마천 사기로 풀린 동북공정 갈등
 
동북공정 문제를 실무적으로 책임지고 있던 박준우 국장은 85일 밤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발등의 불이 된 고구려사 왜곡 문제에 대해 중국 측의 성의있는 태도를 촉구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향한 것이다.
 
중국 관료들은 외교현안이 터지면 담당자 1명 외에는 모두 잠수 타는(연락이 안 되는)’ 특성이 있는데 마침 박 국장은 홈페이지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당·정 고위인사와 면담 일정이 잡혀 있었다. 박 국장은 방중 다음 날인 6일 외교부의 왕이 부부장·추이톈카이(崔天凱) 아주국장, 당 대외연락부의 류홍차이(劉洪才) 부부장·리쥔(李君) 국장을 잇따라 만났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한국은 고조선부터 시작하며 중간에 고구려가 끊기면 지금의 우리는 없어진다면서 고구려는 한민족 정통성의 기초라며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국도 24(정사로 인정받는 역사서 24)를 자랑하고 이 모두를 역사로 인정하지 않느냐면서 역지사지해볼 것을 강하게 촉구했다.
 
박 국장의 중국 출장 2주 뒤 일본통인 왕이 부부장이 주일 대사로 나가고 한반도를 잘 아는 우다웨이(武大偉) 부부장이 취임했다. 왕이 부부장의 교체는 이미 예정돼 있었지만 시기는 예정보다 다소 앞당겨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 부부장은 취임 직후 우리 측에 방한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금요일인 20일에 취임한 우 부부장은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인 23일 쿵쉬안여우(孔鉉佑) 부국장 등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방한했다. 그리고 한중간 마라톤협상이 시작됐다.
 
우 부부장은 당시 최영진 외교부 차관, 반기문 외교부 장관,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 예방에 이은 최 차관과의 만찬회담으로 이어지는 긴 일정을 소화하면서 입장을 교환했다.
 
이 사이 박 국장은 만찬회담 전에 쿵 부국장과 실무 회담을 진행하고 해결방안 초안의 문안을 협의했다. 우리측에서 미리 초안을 잡아둔 상태였기 때문에 논의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입장을 중국이 얼마나 수용할 것이냐로 진행했다. 그러나 미래지향적으로 이 문제를 잘 풀겠다고 한 쿵 부국장이 일부 내용에 수정 필요성을 제기, 실무적으로는 타결이 안 됐다.
 
이에 따라 박 국장과 쿵 부국장도 최 차관과 우 부부장 간의 만찬회담에 참석했다. 외교부 청사 인근의 한정식집에서 진행된 회담은 실무자들이 협의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같은 방의 주빈석에 앉은 차관들에게 찾아가 물어보는 식으로 진행됐다.
 
차관까지 자리하면서 일종의 배수진을 친 채 진행된 회담이었지만 실무협의에서의 교착상태는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다 막히는 부분이 생겨서 다시 차관 테이블로 이동하니 마침 우 부부장이 사마천의 사기를 화두로 대화하고 있었다.
 
박 국장은 이에 대해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사기의 태사공 자서이라고 말했다. 태사공 자서는 사기 열전편의 가장 마지막 장으로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 본인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박 국장은 사기에는 온갖 이야기가 있지만 사마천은 사기라는 위대한 책을 쓴 사람이라는 점에서 태사공 자서가 좋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우 부부장은 박 국장도 사기를 아느냐고 반색하면서 쿵 부국장에게 막히는 게 뭐냐. 웬만하면 박 국장 말대로 해주라고 지시했다.
 
우 부부장의 이 말로 협상 분위기는 급반전됐고 그날 자정께 고구려사 문제 해결 및 정치화 방지를 위해 노력한다등의 내용이 담긴 구두양해에 합의했다.
 
박 전 대사는 교과서 문제 등이 빠지기는 했지만 대체로 우리가 마련한 초안대로 양해됐다고 말했다. 구두양해 타결 후 그해 9월 외교관여권을 일반여권을 변경해 동북 3성에 다녀오기도 한 그는 중국이 구두양해를 90% 이상은 이행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윤광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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