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이창환 기자] <인터넷 이즈 씨리어스 비즈니스>625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된다. ‘두산인문극장 2016:모험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연극으로 처음과 끝의 감상이 사뭇 달랐던 작품이다.

4면이 객석으로 둘러싸인 무대와 객석 사이사이를 섬처럼 진출한 보조 무대들은 자유롭고도 산만한 첫인상을 준다. 등장인물은 많고 관객은 선택한 자리에 따라 관찰할 수 있는 범위가 각기 제한된다. 멀리 떨어진 인물의 대사는 잘 들리지 않고 디테일 적인 요소 역시 가려져 보기 힘들다. (무대 중앙에 모였다가 산발적으로 흩어지는 장면에 한해서 그렇다) 대사 전달의 모호함 경우 자기중심적인 수다가 넘치는 인터넷 환경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윤한솔 연출가도 의도한 부분이었다. 수용 불가능하게 범람하는 인터넷 언어를 연극적으로 청각화했다. 관객은 동시다발적인 대사를 수용할 수 없으나 유저들이 떠들어대는 순간의 집착에 대해서는 짐작하게 된다. 여기에는 언어의 오염과 자체적인 조롱이 담겨 있다. 대사는 빠르고 아주 빠르게 이어지며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은 메시지 아닌 메시지를 전달한다. (물론 대사를 물 쓰듯 쏟을 뿐 그 자체가 허술하지는 않다. 이는 해커들의 성격과 전문성을 드러내기 위한 대사에서 두드러진다)
 
무대와 배우를 사방에서 지켜보는 형태는 두산인문극장 2016:모험의 두 번째 연극 <게임>에서도 차용된 바 있는데 <게임>이 관객들에게 인물을 도찰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면 <인터넷 이즈 씨리어스 비즈니스>는 개방적인 형태를 허용함과 동시에 오프라인 관객을 외면하는 느낌을 준다. 배우들이 객석 사이 책상에 앉아 컴퓨터에 몰입하는 장면에서 그들은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극 초반에는 낯설고 산만한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극이 끝날 때까지도 얻는 게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배자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고를 하라, 검열에 반대하라, 매일 20시간씩 채팅하는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수 있는 것이 미래다 등 몇몇 메시지가 가까스로 혹은 우연히 박히긴 했으나 극과 밀착된다는 느낌과는 별개였다.
하지만 <인터넷 이즈 씨리어스 비즈니스>가 지닌 의도, 예를 들면 대사의 힘에 기대지 않는 것, 준비한 것을 모두 전달하려는 욕심을 버린 것이 회화적이고도 추상적인 풍경을 심어줬고 적지 않은 부분 자체적인 심화로 흘러가도록 도왔다.
리뷰를 쓸 때 극 전체를 장악한 후 세부적으로 파고들어 가기보다는 극을 상징하는 혹은 초월하는 몇몇 대사, 연기와 무대의 일치를 놓고 넓혀가는 방식을 선호하는데 이번의 영향력은 리뷰를 구상하는 개인적 한계도 일시적이나마 벗어나게 했다. 드러난 비극적 쾌락보다는 숨겨진 현실을 알아채게 하는 특별한 작품이다. 자극적이고 속도감이 빠른 인터넷 환경의 연출은 연극 특유의 제한된 현실감각으로부터의 탈피였고 해킹 용어를 두드리는 영웅의 설정은 연극 캐릭터의 확장이었다.
 
<인터넷 이즈 씨리어스 비즈니스>는 관객에게 인터넷 시대의 무감각한 비극을 전한다. 기존 비극들은 인간의 욕망과 비겁함을 나열하고, 운명에 찢기거나 굴종하는 장면을 통해 보편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번 작은 비극으로 소개되지도 않거니와 원인과 결과, 자극과 반응, 불행과 먹먹함같은 순서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인터넷 이즈 씨리어스 비즈니스>에는 해커 집단인 어나니머스 그리고 룰즈섹 멤버들이 등장한다. 천재성을 바탕으로 온라인 자아를 생성한 멤버들은 유희 조롱 폭로가 난무하는 인터넷에서 혼돈 속 탄생, 변화무쌍한 정체를 반복한다. 사이언톨로지교, 국가기관, 독재 정부, 거대 방송 매체를 해킹하면서 명성을 얻고 빅 브라더’, ‘절대적 힘’, ‘거대 자본따위로 상징되는 세력을 거부하면서 영웅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이들의 승승장구는 일부 멤버의 도덕적 노예근성, 오프라인 노출, 법적인 처벌로 붕괴된다.
 
익명성의 인터넷에서 타인의 고통과 슬픔이 희화화된다는 건 모두 알고 있다. 위로가 필요한 상황에서 딴소리를 하거나 배경적 상상력을 끄집어내 다수를 선동하기도 한다. 개인의 몰락 외에도 전쟁, 정치, 종교, 계급, 인종 등 사건은 실체 없는 말 속에 묻힌다. 작품은 이를 인지하면서도 인터넷 유희가 파생하는 자유를 긍정한다. 인간이 가면을 벗는 순간을 희망한다. 가상세계 밖 소통을 불신하는 영웅(해커)들의 태도는 이를 증명한다. 강압적 윤리나 인류 보편성 속에 숨겨진 쇠뇌에 대한 반발이다. 인터넷이 자유의 마지막 보루일 것이라는 극 마지막 나레이션은 인상적인데, 인터넷은 결국 인간성과 분리돼 초월적이면서도 독립적인 자유를 획득할 것이라고도 암시한다. 인터넷의 자유에서 인간이 소외되는 비극.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성역에 얽매이지 않는 유희만이 길들여지고 학습화된 인간성을 탈출하는 길인데, 인터넷 또한 인간을 검열하는 힘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들이 허락한 범위 내에서 놀이가 이뤄지는데 이것은 진정한 놀이가 아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경쟁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도구 내지는 노동의 스트레스를 잠깐 해소하는 오락거리 이상으로 활용하지 못한다.
불의를 비판하는 식의 움직임도 그들의 놀이터에서 이뤄지며, 많은 동조는 언제나 인터넷 정체성에 잠식돼 증발할 수 있다. 우리로부터 변화되고 있다는 착각이 있을 뿐 자유는 요원하다. 소통의 방식인 언어는 순수하지도 파급력을 갖지도 못함을 알고 있다.
 
인터넷 장악을 거스를 수 있는 천재적인 해커(영웅)들만이 자유에 진입할 수 있다. 감시 통제 세력이 구축한 법과 질서를 경멸하는 안티 히어로들이다. 물론 이들의 놀이는 범죄로 전락하는 절차를 밟는다. 영웅들은 현실에서 소외당하고 상처받은 자들이라는 약점도 있다. 활약은 지배자 밑에 억류된 대중들에게 예기치 못한 피해를 끼칠 수 있다. 현실 부적응자들이 우리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될 것이며 프레임 내에서는 엄연한 사실이다. 안티 히어로의 정확한 해석. 자본주의에 묶인 대중들에게는 눈앞의 보상과 노동만이 가깝다.
 
극 중 영웅들은 세상을 바꾸려다가 범죄자가 됐다. 건드려서는 안 될, 고정된 무엇을 뒤집는 것만이 가망 없는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인데 그들의 시도는 영웅이라기보다는 정신병자의 모습으로 남는다. 그런데 만화나 영화 속 대표 영웅들은 단지 지배자들이 용인한 프레임 내에서 꼭두각시처럼 고뇌하고 갈등하는 것 같다. 일방적 질서를 의심하고 교란시키지 않는 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이상적 행위는 없다.
 
유희보다 생산과 가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터넷 현실에서 그에 따른 비극은 존재하나 발견하기 어렵다. <인터넷 이즈 씨리어스 비즈니스> 같은 연극을 통해서나 우리는 시대 비극을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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