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인척의 권력 개입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가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리는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 “지식보다 중요한 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의 주변에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역사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에게 느끼고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서울]은 저자 김갑동이 쓴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를 통해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다룸으로써 누가 옳은 길을 갔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 인물들을 시대 순으로 배치해 자연스럽게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열 번째로 ‘인종과 이자겸’편이다.

숙종이 이자의를 제거한 후 인주 이 씨의 기세는 주춤하는 듯했다. 그러나 인종대에 이르러 다시 외척세력이 등장했는데 그 중심인물이 바로 이자겸이었다.

그는 이자연의 손자이며 이호의 아들이었다. 처음 음서로 합문지후가 된 이자겸이었지만, 그의 둘째 딸이 예종의 왕비가 되어 원자까지 낳자 그의 지위는 갑자기 높아졌다. 참지정사·상서좌복야라는 재상의 반열에 오르고 익성공신에까지 임명되자 그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한안인·문공미 등의 신진세력들은 이자겸을 견제했다. 특히 예종의 태자 시절 스승이었던 한안인은 이자겸이 권세를 쥐고 흔드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예종의 총애를 방패로 당을 규합해 아지겸에 대항했다. 그러나 예종이 죽고 그 아들 인종이 즉위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14세에 즉위한 인종은 이자겸의 외손자로 그의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자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제 이자겸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는 우선 정적인 한안인·문공미 등을 유배 보냈다. 눈엣가시 같았던 존재들을 없애자 이자겸은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러자 이에 빌붙어 출세를 꾀하는 자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이공은 폐하의 외할아버지입니다. 따라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도 신이라 칭하지 말며 연회에도 백관과 함께 뜰에서 하례치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왕위를 넘보다

군신의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건만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단 한 명 김부식만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 부결됐다. 그래도 얼마 후 이자겸은 양절익명공신에 책봉됐고 중서령에 영문하상서도성사·판이 병부사에 올랐다. 모든 신하들의 우두머리로서 문신과 무신의 인사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지위였다.

그의 아들들도 모두 요직에 앉았다. 또 아들 중 출가한 의장을 수좌로 삼아 전국의 승려들을 통제하게 했다. 이로써 이자겸은 불교계마저 장악한 것이다. 마침내는 그 위세에 눌려 왕이 건덕전 문 밖으로 직접 나가 조서를 전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신하가 임금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임금이 신하를 보러 나가는 상황이었다. 이자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과 혼인하게 했다.

다른 외척이 등장할 것을 경계하여 외손자를 사위로 삼은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무소불위의 권세는 그칠 줄을 몰랐다. 이자겸은 자신의 가족인 소세청을 송나라에 보내어 표를 올려 지군국사라 자칭하였다. 이는 모든 국가의 일을 총괄하는 직이라는 뜻으로 왕을 칭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하고 황태자와 같이 예를 갖추도록 했다.

힘을 업은 이자겸의 아들들도 앞 다투어 호화 주택을 세웠다. 여기저기서 뇌물을 들고 와 인사 청탁을 하는 자들이 줄을 이었고, 전국 각지의 뇌물을 실어 나르느라 소·말과 수레가 그칠 날이 없었다. 집에는 고기가 산처럼 쌓여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심지어 국가의 중대사가 있다 싶으면 임금을 자기 집으로 오라고 부를 정도였다.

인종은 성품이 어질고 학문을 좋아하며 스승과 벗에 대한 예가 밝았다. 그러나 일이 이 정도까지 되니 인종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를 눈치 챈 내시 김찬·안보린 등은 동지추밀 지록연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할 작전에 돌입했다.

그들은 상장군 최탁·오탁, 대장군 군수, 장군 고석 등을 불러 세밀한 작전 계획을 짰다. 그들은 야밤을 틈타 궁에 들어가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과 척준경이 아들 내시 척순 및 김정분·전기상·최영 등을 죽여 시체를 궁성 밖에 던졌다. 척준경은 이자겸의 군사적 후원세력이었고 김정분 등은 그 일파였다. 1차 작전은 성공했다.

그러나 그 일파 중 학문이란 자가 궁성을 넘어가 이자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자겸은 즉시 척준경과 아들 이지미를 불러 대책을 논의하고 행동을 개시하였다. 자신의 반대파인 최탁·오탁·권수 등의 집을 불 지르고 군사를 보내 궁궐의 대문인 승평문을 봉쇄하였다.

아들 의장도 현화사로부터 승려 3백여 명을 거느리고 궁성 밖에 이르렀다. 이제는 어찌할 것인가. 궁궐로 쳐들어가자니 인종 쪽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문 앞에서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이 때 척준경이 나서 말하였다.

“이제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면 적이 밤을 틈타 빠져나올까 염려됩니다. 지금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궁궐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곁에 있던 이수가 말렸으나 척준경은 듣지 않았다. 궁궐이 불타오르자 인종을 모시고 있던 신하들은 달아나거나 척준경의 칼날에 쓰러졌다.

결과는 인종 측의 패배였다. 인종은 어쩔 수 없이 옥새를 이자겸에게 넘겨주고 선위한다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그러나 이수가 다시 이를 막았다. “비록 주상의 조서가 있으나 어찌 이공이 이를 받겠습니까.”

인종 구사일생 후 이자겸 제거

이자겸은 주춤하고 다시 옥새를 돌려주었다. 그 외에도 이자겸과 척준경은 난이 일어나던 날에 숙직한 자는 모두 죽이려 했지만 이수가 강력히 반대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수는 이자겸과 육촌 형제간이었으나 양심이 있는 사람이어서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자겸은 곧 인종이 옥새를 줄 때 거절한 것을 후회했다. 어차피 지금 상황은 그가 왕이나 다름없었다. 시중에는 곧 ‘십팔자’가 왕이 된다는 소문이 퍼졌다.

‘십팔자’는 ‘이’를 쪼개놓은 글자이니 곧 이 씨가 왕이 되리라는 뜻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이자겸은 내친 김에 인종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려 했다. 그는 넷째 딸을 불러 인종에게 떡을 갖다 주도록 했다.
떡 속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알았지만 아버지 명을 거역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남편을 죽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떡을 주면서 인종의 귀에 속삭였다. “떡을 드시지 마십시오”

인종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떡을 먹는 척하다 밖에 버렸다. 또 한 번은 독이 든 약을 보약이라 속이고 인종에게 주도록 했다. 왕비는 약을 들고 문지방을 넘다 걸려 미끄러진 척하면서 약사발을 엎었다. 왕비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인종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인종과 이자겸. 그들은 외할아버지와 외손자 사이이기도 했고 장인과 사위이기도 했다. 이자겸은 나이 어린 외손자를 왕위에 앉혀 권력을 독점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두 딸까지 정략적으로 결혼시켜 옭아매려 했다. 그러나 인종도 왕으로서의 권위를 세워야 했고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고 해도 왕권을 침범하는 것을 차마 넘길 수는 없었다. 마침내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고 그의 집안을 모두 멸절시켰다.

아무리 왕의 친척이자 왕과 맞먹는 강력한 권력을 소유했다고는 하나 결국 이자겸은 찬탈자이며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히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나라의 올바른 체계와 순리를 되찾기 위해 제거돼야만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지도자의 친인척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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