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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늦춰달라던 북한에 큰 충격
 
1992715일 오전 평안북도 묘향산 별장. 평양을 출발한 첸지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김일성(1994년 사망) 주석의 표정에는 초조감과 착잡함이 묻어났다. 첸 부장이 들고오는 베이징(北京)의 메시지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터였다.
 
같은 해 415일 양상쿤(楊尙昆) 중국 국가주석이 평양을 다녀간 때가 정확히 석 달 전이었다. 김 주석의 80세 생일 축하행사 참석차 방북한 양 주석은 조심스럽게 이제는 한국과 관계를 정상화할 때가 가까웠다고 운을 뗐다. 한중 수교를 추진할 방침임을 처음으로 시사한 발언이었다. 당황한 김 주석은 일단 양 주석에게 수교를 적어도 23년만 늦춰달라고 요청했다. 북미 관계가 새롭게 진전되고 있으니 보조를 맞춰달라는 취지였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인정하고 중국이 한국을 인정하는 교차승인’(Cross Recognition) 구상을 다급하게 꺼내든 셈이다. 양 주석은 예스(yes)나 노(no)를 하지 않은 채 답변을 얼버무렸고, 이때만 해도 중국을 믿어 의심치 않던 김 주석은 자신의 뜻이 수용된 것으로 확신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불과 석 달 만에 천 부장을 특사로 보내겠다고 전갈을 보내오자 김 주석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북한의 집요한 정보추적에 중국은 철통 보안을 유지했지만 이미 양 주석으로부터 언질을 들은 바 있는 김 주석은 한중 수교와 관련이 있음을 눈치챘다. 묘향산 별장에 당도한 전 부장과 통역 장팅옌(張庭延.초대 주한 중국대사)은 김 주석을 만나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장쩌민(江澤民)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구두메시지를 낭독했다.
 
김 주석의 예감대로 한중 수교를 공식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북측에 최후통첩한 것이다. 김 주석은 매우 침통한 표정 속에서 잠시 숙고한 뒤 짤막하게 우리는 자주노선을 걷겠다. 중국이 하는 일은 중국이,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가라고 말했다. 6·25전쟁을 계기로 혈맹(血盟)’으로 발전해온 북중 관계를 감안할 때 이는 폭탄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는 중국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우리의 길을 걷겠다는 의미로, 중국에 대한 강도 높은 배신감과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그날 첸 부장과 김 주석과의 만남은 전례 없이 짧았고 의례적인 오찬연회조차 열리지 않았다. 첸 부장은 2003년 펴낸 회고록에서 아마도 중국 대표단이 김 주석을 만난 중에서 가장 짧은 회동이었다고 술회했다. 이는 중국이 혈맹관계인 북한으로부터 외교적 냉대를 당한 것으로, 김 주석이 받은 충격의 강도가 얼마나 컸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김 주석이 중국에 통고한 자주노선 표방은 사실상 북핵 문제의 서막이었다. 구소련 체제가 붕괴된 이후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중국이 남한과 덜컥 수교하는 상황에 처하자 김 주석이 느끼는 외교적 고립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북한은 그때부터 믿을 것은 핵()이라는 인식 속에서 핵무기 개발에 사생결단 식으로 매달린 것으로 보인다.
 
1992년말 남북간 핵협상이 결렬되고 북한이 19933월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를 탈퇴, 1차 핵위기를 촉발시킨 것도 그 기저에는 한중수교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북중 관계에 금이 가면서 핵개발이 북한에 유일한 안보적 대안이 된 셈이다.
 
이렇듯 동북아 외교질서를 뒤흔든 한중수교를 결정한 이는 바로 중국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혈맹인 북한 김일성 주석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집단지도체제의 총의로 한중수교를 추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중수교는 한마디로 정보전(情報戰)’의 승리였다. 대만과 북한은 각각 자국의 최대우방국인 한국과 중국이 어디에선가 수교를 논의하고 있다는 눈치를 채고 이를 예리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특히 북한이 고도의 정보망을 동원해 한중수교 움직임을 간파하고 적극적 방해 공작을 펴는 것이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였다.
 
덩샤오핑의 특별지시에 따라 비밀교섭을 추진하던 중국측은 북한에도 극비보안을 유지했으나 김일성의 중국 내 영향력이 워낙 막강한 터라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교협상에 가담한 한국의 외교관들은 가히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첩보전을 펼쳤다. 당시 국내에서 한중수교 추진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김종휘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외교비서관, 이상옥 외무장관, 김석우 외무부 아주국장 정도였다.
 
이상옥 외교장관은 그해 56일 한중 수교문제를 논의할 예비교섭 대표로 권병현 외무부 본부대사를 정하고 권 대사에게 이를 정식 통고했다. 이 장관은 권 대사에게 고향 아버님이 병환 중이어서 시골에 가 있는 것으로 위장하라고 지시했다. 신정승(주중대사·2008~2009) 동북아 2과장은 그날로 병가를 내고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가장해 권 대사를 도왔다. 다음날부터 권 대사와 신 과장은 동빙고동 안가로 배치돼 역사적인 한중수교 비밀회담 실무준비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안기부장과 차장, 차장보도 와 있었다. 김석우 아주국장은 밤중에 혼자 차를 몰고 안가에 와서는 권 대사가 준비한 보고서를 장관에게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았다. 이 장관은 집사람에게도 비밀을 엄수하라고 신신당부했던 터라 교섭대표단은 집안에서조차 입조심했다는 후문이다. 중국 베이징으로 떠나는 권 대사에게 부인이 행선지를 물은 뒤 답이 없자 그럼 추운 지방이냐, 더운 지방이냐를 재차 물었는데도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그러자 부인은 여름옷과 겨울옷을 모두 챙겨줬다는 일화가 있다.
 
수교협상은 끝났으나 마지막 걸림돌은 대만에 어떤 식으로 사전 통고하느냐였다. 장제스(蔣介石) 총통 시절부터 임시정부 수립과 해외 독립운동, 건국과정에서 많은 빚을 졌던 정부로서는 어떤 해명으로도 배은망덕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일단 대만 정부가 한중수교에 따른 충격을 수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미리 통고해주기로 했으나 그 시점을 언제로 할 것이냐를 놓고는 정부 내에서도 견해가 엇갈렸다.
 
정부는 대만이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한중수교 사실을 대만 정부가 먼저 터뜨리도록 배려했다. 한중 수교 이틀전인 822일 대만의 첸푸(錢復) 외교부장은 한국의 대()중국 수교결정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과 단교한다고 공식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외무부 출입기자단을 상대로 한 첩보전도 숨막혔다. 당시 출입기자단은 우리가 모르는 외교기밀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당시 일부 유력매체들은 한중수교가 추진되고 있는 낌새를 채고 당국자들을 상대로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담당 실무자인 김석우 아주국장은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고 애매모호하게 답변하며 기자들의 예리한 취재공세를 피해 나갔다. ‘아슬아슬한줄타기였지만 결국 국내 언론을 상대로 보안(保安)을 유지하는 데는 성공할 수 있었다.
 
<윤광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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